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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서재를쌓다 2017. 10. 15. 20:28




       여행을 좋아하는가. 사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고민 해왔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돌아오는 날 무척 아쉽다고 하는데,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돌아오는 것이 다행인 날들이 많았다. 이만 하면 돌아가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들이 많았다. 내가 여행지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계획을 짜는 중일 때나 (사실 계획도 잘 짜지 않는다) 여행 중일 때보다, 돌아와서 일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돌아와서 그곳의 이야기와 역사가 더 잘 읽히고, 보이고, 들린다. 남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글을 읽어 보면 그렇지 않아서 늘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남들의 여행은 떠나 있는 순간 전부가 늘 행복하고, 축복이며, 즐거워보였다. 나는 늘 그렇진 않았으니까. 많은 순간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모든 시간이 그렇진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고, 저녁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일정이 버거울 때가 있었는데, 큰 돈 들여 이 곳에 왔으니 나가야지하고 움직일 때면 이것이 진정한 휴식인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조금씩 느리게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점점 깨닫고 있다. (나이 때문일까 흑흑)


       여행기도 좀더 솔직하게 쓰고 싶고, 좀더 솔직한 여행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을 만났다. 속초의 동아서점에서 만든 '아주 사적인 속초 여행지도'를 얻기 위해 샀는데, 불광문고에서 여행서 두 권 이상 구매하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이 책과 다른 여행책을 샀는데, 둘다 그런 책이었다. 행복 일색이 아닌 좀더 솔직한 여행기. 이다혜 기자는 친구가 무척 좋아하는데, 씨네21의 책소개 코너에서 글을 봤을 때와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이미지가 무척 달랐다. 아무래도 이름 때문인 것 같은데, 좀더 다정한 목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친구는 이다혜 기자가 혼자서 잘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구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부분은 잘 안 읽히기도 했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훨씬 잘 읽혔다. 읽고 싶은 책들도 생겼다. 아래는 포스트잇 붙힌 문장들. 많이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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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났을 때만 '나'일 수 있는 사람들은 나름의 행복을 찾은 이들이겠지만, 나는 떠났을 때만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결국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는, 나라는 인간의 통일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여행이다. 이곳에서의 삶을 위한 떠나기.

    - 9쪽


       나는 여행을 떠나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을 싫어한다.

       우리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나 자신을 가지고 간다. 속옷 한 장 없이 떠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없이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

        진정한 자아는 어디 있는가? 성지에? 템플스테이에? 인도에? 내 자아는 내 집, 내 방에 있지 않을까?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비일상의 경험을 하며 자아를 찾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생활을 지속해야 할 일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왕복 여정을 떠난다면, 내 자아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의 상황을 주시할 일이다.

    - 13쫄


        일행이 있는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반드시 혼자 떠나는 여행을 또 가야 성이 차는 나와(일행 유무에 따라 여행은 완전히 다른 장르로 나뉜다), 가족이 함께 가는 여행이 아니면 아예 돈이 낫다는 주위의 어머니는 얼마나 같고 다른 사람인 걸까. 어머니가 좀 더 건강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지금의 나는 더 길고 자세하게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 24쪽


       뉴질랜드 북섬 로토루아에는 와이토모 동굴이라는 곳이 있다. 반딧불 동굴이라고도 불리는데, 동굴의 바닥까지 내려가, 마지막에는 캄캄한 가운데 밧줄을 붙잡고 동굴 바닥을 흐르는 물길 위에 뜬 쪽배에 올라탄다. 모두 안전하게 탄 게 확인되면 안전요원이 설명한다. 이제부터 불을 끌 것이다. 전혀 위험하지 않다. 당신들은 옆에 만져지는 밧줄을 당겨라, 그러면 배는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불을 끄면 위를 쳐다보아라. 그리고 정말 완전한 소등. 암흑, 암흑? 머리 위를 보는 순간 마치 가장 공기가 맑고 빛이 없는 지역 밤하늘처럼 반딧불 수천 마리가 빛나는 장관이 펼쳐진다. 하늘은 멀지만, 동굴 천장은 멀지 않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안전요원의 설명대로 보트를 맨 줄을 당겨가며 앞으로 이동하면서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냥 여기에 더 머물고 싶다고. 밖으로 나와 숲을 산책하면서, 반딧불은 곤충 아닌가? 그 위에 수천 마리가 그러고 어쩌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막 떨어지고 그런 것도 있을 텐데, 어두워서 못 본건가? 으윽. 원효의 해골물 같은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렇게 관광객이 드나드는 일이 반딧불이에게는 괜찮은 것일까도 근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와 그 경험을 떠올려보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다.

    - 49-50쪽


       처음에는 정보 얻기가 수월해서 한국인이 가는 숙소, 한국인이 가는 코스를 답습하다가 그 코스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트랙을 벗어나 오프로드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만의 여행이 완전한 사이클을 갖게 된다.

    - 65쪽


       굳이 혼자 떠나야 한다는 말을 할 생각은 없다. 일행을 원하는 마음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비용 문제일 경우도 있고,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맞는 줄 알았던 일행과 안 맞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도 여행이 가르쳐 주는 큰 가르침 중 하나. 가족과 사는 일과 혼자 사는 일은 다를 뿐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여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 100쪽


       여행이라는 것은, 우울치료제로 여행을 복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더없이 넓은 동굴이고 또한 가장 작은 동굴이다. 그런 여행에서는 아무와도 친구가 되지 않는다. 나 자신과도 더 친해지지 않는다. 그냥 나를 잘 모르겠고 내가 싫은 상태로 어딘가로 갔다가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냥, 동굴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게 전부다.

    - 107쪽


    내가 웃은 것과 별개로,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귀 기울일 만한 것인데, 이런 것이다.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 평소 습관에서 벗어나고자 멀리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다는 것."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그 경험이 의미를 획득하고 내 자아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다. 집에 가만이 앉아, 내가 본 것들을 오래 지속되는 통찰력에 차곡차곡 담을 때 비로소 그 경험은 내 것이 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 154-155권


    배가 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졸리지 않으면 자지 않는다.

    음악을 배경으로 쓰지 않는다. (일 능률이 안 올라서 '노동요'를 틀고 울며 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리라 믿는다.)

    뜻을 모르겠는 여행지의 소음 속에 그냥 서 있는다.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생각하며 바람을 느끼며 걷는다.

    시계를 보지 않고 맛을 느끼며 먹는다.

    지하철에서 뛰지 않는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바뀌는 신호등을 보내고, 출발하는 버스를 그냥 보낸다.

    시간을 그냥 보낸다.

    고작 이런 걸 하기 위해 날 찾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지낸다. 바다를 보고 있거나 정원을 보고 있거나 그냥 잠만 자거나.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없이 살아본다. '혼자' 여행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 시간이 내게 소중해서다. 시간을 그냥 보내기 위해서.

    - 159-160쪽


       가끔은, 여행을 간다는 자체가 예쁜 쓰레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축의 중요성을 내게 설파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도 그렇다는 말이다. 의미 있고 즐겁고, 그 순간에는 무한히 행복하지만, 결국 다시 꺼내보지 않을 사진을 잔뜩 찍고, 카드명세서를 길게 만들어 억겁의 후회를 하게 만들고, 그냥 누워서 잠이나 잤으면 피로라도 풀렸을 텐데 피로를 더 쌓고 끝나는 그런.

       나에게나 의미 있는 일.

       그래, 그걸 인생이라고 부르더라고, 보통의 인생.

       나에게나 의미 있는 일.

    - 167-168쪽


    그리고 나중에 바티칸 기념품숍에서 천장화 그림을 하나 사가세요. 앗, 참고로 거기서 그림을 사신다고 제게 돈이 떨어지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니거든요. 사고 싶으면 사시고 아니면 안 사셔도 아무 상관 없어요. 하지만 나중에 살아가는 일이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들면 천장화를 꺼내 보시고 오늘 이곳에서 본 천장화를 떠올려보십시오. 그 그림을 몇 년에 걸쳐, 완성할 지 기약도 없는 채로 그려갔던 미켈란젤로를 떠올려보십시오. 그러면 아주 조금은, 더 노력해보자는 힘이 나지 않을까요.

    - 202-203쪽


    왜 1천 명이 넘는 학생들을 밤새 걷게 하는 학교 전통이 있을까를 불만 섞인 마음으로 지켜보던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역시 온다 리쿠의 문장들이다. 살고 있는 동네를 80킬로미터나 걷는다는 것은, 평소에 가지 않던 지역으로 들어선다는 뜻이 된다. 간략화된 지도롸 노선도로만 세상을 바라보다가, 선과 면, 최적의 거리가 아니라 그냥 이 세계의 모든 곳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출발한 직후에는 쉬지 않고 떠들던 학생들은 몸이 피곤해지면서 점차 말수가 줄어든다. 그리고 저마다의 생각이 잠긴다.

    - 227쪽


    제주도에 수국이 가장 아름답던 계절에 방문한 적이 있다.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집까지 30분, 등도 없는 어둑한 밤에 오솔길을 걷던 시간을 잊을 수 없다. 수국의 계절이 모퉁이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마다, 그 고요한 만개의 풍경에 마음이 셀렌다.

    - 238쪽


       서울 시내에서 이런 산책을 부르는 길은, (내 친구들은 다 나와 몇번씩 이 길을 걸었을 텐데) 경복궁역에서 부암동 주민센터까지의 길과 북촌의 골목을 에두르는 가회동 길, 그리고 시청역에서 정동길을 걸어 도착하는 경향신문사까지의 길이다. 이 길을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하면 못 할 이야기가 없고, 흘리지 못할 눈물이 없다.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정동길을 혼자 걷는다. 비오는 주말 밤의 이 길은 조금은, 살아있기를 잘했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 248쪽


       봄이나 가을도 장소에 따라서는 성수기가 된다. 한국의 봄, 가을은 짧아서 문제지 날씨만으로도 무한히 행복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때가 된다. 이 계절의 기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원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스피츠의 노래 <운명의 사람> 가사를 빌면, '달린다 아득한 이 별의 끝까지'의 기분. 이런 때는 집 근처 산책을 가장 열심히 하지만, 벚꽃놀이나 단풍놀이를 위해 일본도 꽤 다녔다. 성수기에는 방 잡기도 어렵고 식당 빈 자리 찾기도 어렵고 극심할 때는 매표소 줄을 30분씩 서서 들어가 앞사람과 밀착하다시피 걸어야 하기도 하지만, 다녀보면 성수기가 성수기인 이유가 있다.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 사진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행의 재미라는 것은 퉁퉁 부은 발과 견딜 수 없는 허기짐, 약간 춥거나 더운 날씨와 그 모든 불평을 일시에 재우는 "와..."의 순간, 말을 잊게 하는 그 한순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에는 상쇄해야 할 고통이 없다. 원래 상쇄해야 할 고통이 있으면, 별로 안 좋은 것도 더 좋게 느끼고 그러는 법이거든. (웃음) 그리고 그런 정신승리는 어떤 경험이든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중에 남들이 보면 의미 없지만 내게는 의미 있는 사진들이 있다. 그건, 거기 숨은 이야기를, 프레임 밖의 사연을 나는 몸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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