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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년필
    모퉁이다방 2017. 2. 9. 23:12



       

       그녀는 실리의 책상으로 다가가 첫번째 서랍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납작한 가죽 필통에 만년필이 들어 있었고 그게 언제나 거기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끈으로 묶인 가죽 필통을 열 때 허둥댔다. 실리의 만년필이 거기 있었고 그녀는 만족스러워 그것을 손에 쥐었다. 종이에 글을 적을 때는 만년필로. 그건 그녀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실리의 생각이었다. 실리는 자주 그렇게 말하곤 했고 평생 두 자루의 만년필을 가졌는데 어쩌면 그녀가 모르는 만년필을 한 자루쯤 더 가졌는지도 몰랐다. 누가 알겠나. 그녀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누가 알겠나...... 그녀는 서랍에 든 잉크병을 쥐고 뚜껑을 비틀어보았다. 검푸른 가루가 떨어졌다. 잉크는 고체가 되어서 병을 뒤집어도 흐르지 않았다. 펜촉도 잉크를 머금은 채로 굳어 있었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만년필을 부엌으로 가져가서, 생전에 실리가 자주 했던 것처럼, 유리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 펜촉에 담갔다.

    - p, 93 황정은 <아무도 아닌> '명실'



       지하철 안이었을 거다. 이 부분을 읽고 있었던 게. 불현듯 어떤 장소가 떠올랐다. 신촌에 있는 커피집의 단체석. 2주에 한 번씩 모여 누군가가 써온 걸 두고 이야기하는 장소였다. 모두 참석하면 다섯 명 정도 였는데, 늘 그렇진 않았다. 그 시간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나와 친구, 그리고 그 분. 친구가 만년필 리필액을 한 묶음 샀는데, 너무 많다며 반을 내게 줬다. 나는 오랫동안 쓰지 않고 있던, 친구에게서 선물받은 만년필을 필통에서 꺼냈다. 다 쓴 잉크액을 빼내고 새 잉크액을 꽂았다. 종이에 글씨를 써 보려는데 나오지 않았다. 그 분이 이야기했다. 따뜻한 물을 받아서 잠시 담궈두면 되요. 그때부터 만년필을 따뜻한 물에 담겨놓을 때면 그 공간에 세 명이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 시절, 나는 참 부끄럽고 창피했던 게 많았다. 지금에 와서야 좀 부끄러우면 어때, 좀 창피하면 어때, 라고 생각하지만. 친구의 말대로 그걸 이겨내고 그대로 나갔다면 어땠을까.


       어제, 친구는 아기띠를 하고 아가를 앞에 안고 나를 배웅해줬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데, 너무 더웠다며 외투도 걸치지 않고 따라나왔다. 네 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아이들 돌보느라 셋이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헤어지던 참이었다. 우리는 횡단보도까지 같이 걸었다. 친구가 말했다. 오늘 할 얘기가 많았는데, 아쉽다. 그리고 몇 발자국 더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금냉, 나 암이래. 언젠가 금냉, 나 임신했어, 라고 말했던 것처럼. 심각하지 않은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 알았고, 어떻게 했으며, 어떻게 할 것인지 말해줬다. 친구와 헤어져 택시를 탔는데, 최백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언젠가의 밤택시에서도 최백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도 최백호가 라디오를 하네, 찾아서 들어봐야지, 생각했는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떠올랐다. 많은 것들이 그냥 지나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도. 우리가 그런 나이가 되어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도.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친구가 먼저, 말해주는 게 언제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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