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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를 읽는 계절
    서재를쌓다 2008. 12. 21. 17:16


       p.304-305


        오늘 이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따뜻해졌다. 12월에 나는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를 읽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야 내가 윤대녕을 읽은 계절이 거의 겨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울과 윤대녕. 이건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조합이다. 소설은 겨울이 한창일 때 시작되었다가, 봄이 오기 직전, 그러니까 겨울이 가기 직전에 끝이 났다. 아주 깜깜한 어둠이 아니라 파랗게 어스름이 깔려오는 새벽녘이라는 뜻이다. 요즘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라는 노래를 듣고 있는데, '유자차' 노래가사에 비유하자면, 과거를 유자 사이에 켜켜이 넣고 뜨거운 눈물을 부어 마시는 거다. 그리고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소설을 읽으면서 언젠가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윤대녕의 작업실을 생각했다. 복층 구조의 깔끔한 작업실. 복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 구석에 책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던 풍경. 작가는 그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옛날 영화를...>의 남자가 사는 집이 작가의 작업실과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소설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남자, 남자의 옛 친구 E, 남자의 부인, 남자의 장인, 레코드 가게의 여자, 그리고 그 여자. 외로워서 약을 먹고, 쓸쓸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평행선을 생각했다. 소설에는 삼각형이 언급된다. 남자와 E, 누에고치의 여자는 삼각형이다.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이기도 하다. 세 사람은 삼각형 각각의 꼭지점에 서 있다. 그리고 2호선 어딘가의 역에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만날 수도 있고, 결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관계다. 삼각형 중심을 향해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한 삼각형의 세 사람은 만날 수 없다. 도착했다 떠나고 도착했다 금세 떠나고 마는 초록색의 2호선을 올라타지 않는 한, 혹은 내리지 않는 한 타원형의 세 사람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내게는 평행선의 남자가 있다. 점을 봐 주던 할아버지가 내게 너와 그 남자는 평행선이라고 했다. 영영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엉엉 울었다. 그 어떤 단언의 말보다 아프고도 확실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니 그와 나는 삼각형도 타원형도 아닌 평행선일 뿐이므로,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이제 평생 만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다. 바라볼 수는 있겠다.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아주 멀리서. 아니다. 이건 아주 가까운 평행선일 수도 있다.

       주드 로가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가 아닌 알랭 드롱이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를 챙겨봐야겠다.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도 봐야지. 옛날 영화를 간간히 틀어주었던 경사도 낮은 코아아트홀에서 눈 오는 날 혼자 보러 가면 좋겠지만, 이제 코아아트홀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 '블루문'도, 벌레구멍 입구도. 어느 쓸쓸한 주말 저녁에 불을 다 꺼 놓고 집에서 혼자 보아도 좋겠다.

       연락이 없던 친구는 책 4권을 보내줬다. 보고 싶은 언니는 새벽 2시에 문자를 보내왔다. 이건 내가 평행선이 아닌, 삼각형 꼭지점에 서 있다는 거다. 멈추지 않는 타원형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겨울은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갑자기, 불현듯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 계절임이 분명하다. 내가 얼마나 외로움을 잘 타고, 여리고 약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계절. 그래서 겨울에는 술을 더 많이 마시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는 수밖에 없다. 윤대녕을 읽을 수밖에 없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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