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은행나무



. . . 지금 당장 거짓말을 죽이지 않으면 진실이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두려웠다.
p.347

    惡人. 요시다 슈이치가 악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요시다 슈이치 이름으로 국내에 발간된 책 제목들을 쭉 훓어보니 나는 그의 책을 반쯤은 읽었다. 그의 소설들이 좋은 이유는 그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일요일들'의 느낌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항상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는 그 한 명 한 명의 평범한 일상을 엇갈리듯, 무심하게, 스쳐가듯 이야기한다. 마치 어젯밤 건대입구역에서 탄 7호선의 4-1에서 지하철에 올라탄 나와 4-1에서 내린 어떤 사람을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한번도 인사를 나눈 적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라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듯이. 마치 영화 <접속>에서 좁은 계단 통로를 스쳐지나갔던 여인2와 해피엔드처럼. 그저 일상을 보여줄 뿐, 더 깊이있게 파고들지 않는 면도 좋았다. 그는 보여주고, 그것을 읽는 내가 깊이있게 파고들는 것. 심드렁하게 인물 한 명, 한 명의 풍경화를 그려나가다 보면 어느새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느낌. 잡아두고 싶지만 늘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평온한 일요일 오후같은 느낌. 그것이 요시다 슈이치의 이름의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기대하는 느낌이다.

   그래. 왠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이 제목. 악인. 그리고 그 악인에 대한 이야기. 나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그래, 이건 요시다 슈이치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오후의 느낌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요일의 어느 시간을 꼬집어서 말할 수도 없는 느낌. 책을 받아든 순간, 너무 두껍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량부터 잘못된 거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렇게 두껍지 않아. 얇은 이야기. 무심한듯 방관자적인 시선. 단지 흘러가는 장소와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이건 너무 두꺼웠다. 그리고 요시다 슈이치 치고는 너무 극단적이였다. 그리고 너무 따뜻했다.

   <악인>은 어쩌다 사람을 죽이게 된 악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요시다 슈이치는 500여 페이지에 걸쳐 '악인'을 이야기하는데, 중반을 넘어선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악인'이라는,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 처음에 당신들이 생각했던 인물이 과연 맞는가, 라고 우리에게 물어온다. 분명 사회에서 바라 본 '악인'이라는 사람은 이 사람인데, 그 '악인'이 정말 악한 사람이 맞느냐고. 아니다. 물어온다기보다는 그렇지 않다,고 요시다 슈이치는 말한다. 누가 사회가 정의한 '악인'을 악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냐고. 결국'악인'은 사회라고. 사회의 환경이 어떤 사람을 '악인'으로 규정짓고 있다고. 사회의 그릇된 시선들이 악한 행동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p.439

   그러니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으면 했다. <악인>에서 요시다 슈이치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여러 인물들이 엇갈려서 등장하는 소설의 구성뿐이었다. 늘 엉성하게 연결되어있어 그것이 맞물려지는 순간 아,라는 쾌감이 느껴졌었던 전작들이 아니다. <악인>의 인물들은 처음부터 서로 깍지를 낀 듯 단단하게 연결되어져있어 맞물려지는 어떤 순간의 쾌감이 없었다. 소설의 말미에는 챕터들의 연결이 너무 인위적인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동작으로 이어지는. 실제 일본에서 신문 연재되었던 것이라는데, 연재 형식으로 읽었으면 느낌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은 처음부터 선과 악이 너무나 분명해 그것도 요시다 슈이치스럽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나 분명했다. 소설에서 강조하는 이야기가. 공기는 시간을 따라 장소를 따라 흘러 나가지 않고, 자주 머물렀다. 어떤 장소와 어떤 시간과 어떤 사람에게.

   긴 분량을 끊기지 않고 빠르게 읽었다. 재미도 있었다. 너무 신파적이라는 생각도 들긴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아쉬움이 밀려왔다. 변화가 없어서 그 사람의 작품이 싫어졌다는 사람 있지 않나. 영화든 책이든. 예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아니다. 변하는 걸 보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것을 읽으면 되지 않나. 내가 그 사람의 창작물을 여전히 찾는 건 내가 기대하는 그 사람의 느낌 때문이다. 전작들을 통해서 느껴졌던 고 좋은 느낌. 이야기가 달라지고, 인물들이 달라져도 여전히 느껴지는 그 느낌. 요시다 슈이치에게서 무라카미 류를 기대하지 않는 것. <악인>에서는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그 느낌이 느껴지지 않아 별로였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책이 또 나오면 나는 요시다 슈이치라는 이름을 기대하며 열심히 읽을거다.

    내일은 <일요일들>이나 한번 더 읽어야겠다. 일요일이니까. 요시다 슈이치를 제대로 느껴줘야지.

  1. 박양 2008.02.25 09:50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맨 위에 문장 정말 명언이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2. 곡예사 2008.02.25 18:42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전 역시, 요시다 슈이치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이분법적이었을지 몰라도, 보여지는 한 인간의 이면과 속내에 이토록 열중하는 작가는 흔치 않아, 그러면서 책을 덮었죠. 그리고 두꺼워서 너무 좋다, 했어요. 저의 애정이 너무 무조건적인 걸까요.ㅋㅋ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2.25 19:18 신고 BlogIcon GoldSoul

      제가 변한건지도 몰라요. 요시다 슈이치가 아니라 제가. ㅠ 아, 그런걸까요? 곡예사님은 그렇게 느끼셨다고 하니. 저 지금 진짜 고민에 빠졌어요. 리뷰 쓰면서도 혹시 내가 변한건가,하는 생각했었거든요.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3. BlogIcon 제노모프 2008.03.09 10:06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요시다 슈이치가 <퍼레이드>의 그 작가 맞죠? 집에 굴러다니길래 틈틈이 보고 있어요. <악인>은 새 작품인가봐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10 19:11 신고 BlogIcon GoldSoul

      네. 그 요시다 슈이치가 이 요시다 슈이치예요. <퍼레이드>는 제가 좋아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악인>은 이번에 나온 요시다 슈이치 새 작품이구요. :)

  4. 노조미 2008.03.25 18:09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우와~~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시나요...^^

    저도 요즘 요시다 슈이치에 푹 빠져서 전작들도 열심히 사서
    읽어보고 있답니다~~

    님 리뷰를 보고나니, 악인 한번 더 읽고 싶어지네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26 02:30 신고 BlogIcon GoldSoul

      에이. 아니예요. 다시 읽어보니 낯 뜨겁네요. 괜찮게 읽어놓고선 내가 생각했던 요시다 슈이치가 아니라서 실망! 실망! 했소이다, 요 말만 계속 하고 있네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제가 읽은 요시다 슈이치 글 중에서 연쇄 살인을 하던 냉혈 살인마도 있었어요. 아. 새벽에 갑자기 그 비가 내리는 장면이 생각나면서 섬뜩해지는 걸요. 빨리 자야겠어요. 무서라.

  5. BlogIcon 베레베레 2009.02.18 13:08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인가? 란 제목이 마음을 끌었어요.
    저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역시 요시다 슈이치다, 란 생각으로 마지막장을 넘기게 되네요.
    저도 저 첫번째 문구에서, 털컥 했어요.
    아.... 휴.....

    마치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는 듯 한 기분으로 쭉.. 읽어내려간 이야기네요.
    슈이치가 이제 다시 사랑이다, 란 타이틀로 사랑이야기를 냈다고 하는데,
    빨리 읽어보고 싶어요.
    슈이치말로, 왜 자기 소설이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지, 혹은 일본소설이 왜 요즘 한국 출판계를 뒤흔들어 놓는지 모르겠다고 했을때, 이거 우릴 비웃는건가? 라면 약간 얄미워지기도했지만,
    역시 그래도 난 이 작가가 좋네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9.02.18 20:28 신고 BlogIcon GoldSoul

      안녕하세요, 베레베레님. 닉네임이 뭐랄까, 베레베레해요(제가 이러면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
      저한테 <사랑을 말해줘>란 이번 신간이 있어요. 어찌어찌해서 얻게된 책인데, 아직 못 읽었어요. 다시 사랑이다,가 타이틀이군요. 저는 처음 그 책을 보도 다시 얇아졌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헤헤-
      저도 요시다 슈이치가 좋아요. 이번에 나온 두 권의 책이 그 전의 책들만 했으면 좋겠어요. 반가워요, 베레베레님(또 고개를.^ ^;)

  6. BlogIcon 검은괭이2 2009.05.03 22:0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얼떨결에 들어서 산 소설인데요, 정말 님 말씀처럼 요시다 슈이치의 느낌은 없더군요. 나름 재미도 있었고 슬펐고 또 나름 감동도 있었지만 약간은.... 핀트랄까요?? 그런 게 어긋나는 느낌이었달까요?? ㅎ 즉 요시다 슈이치와 이 악인에 쓴 글 사이에요 ㅎ

    •  address  modify / delete 2009.05.05 23:25 신고 BlogIcon GoldSoul

      <악인> 이후로 요시다 슈이치 소설을 못 읽었어요. 다음에 나온 소설들은 <악인>과 비슷한 느낌일까, 그 전 소설들과 비슷한 느낌일까 궁금하지만 손도 못 대고 있어요. 그나저나 요시다 슈이치가 한국에 온다지 뭐예요. 꼭 작가와의 만남에 초대받고 싶어, 신청해놓긴 했지만 왠지 똑하고 떨어질 것만 같아요. 직접 꼭 보고싶은데 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