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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다.
좋았든 별로였든 허진호 영화는 보고 나면 머릿속에서 여러번 곱씹어보게 된다.
어제 <행복>을 보고 오늘 든 이런저런 생각들.
하나.
허진호 영화 속 여자들을 생각해보면
얼굴이나 분위기는 부드럽고 여리고 보듬아주고 싶은 이미지로 비슷비슷하지만
영화 속 그들은 남자들보다 더 적극적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심은하는 늘 먼저 한석규의 사진관을 방문하는 입장이었고,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는 먼저 라면을 먹고 가라고 하더니 자고 갈래요? 라고 했고,
<외출>의 손예진도 술에 취해 농담조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 복수하게 우리 사귈래요, 라는 과감한 멘트를 날렸다.
그리고 <행복>의 임수정도 저 옮는 병 아니예요,라며 그를 유혹했다.
둘.
영화 속에서 유난히 거울을 보는 씬이 많이 등장하는데
은희(임수정)이 거울을 보는 씬들은 대개 초반부였다.
두 사람의 사랑이 둥실둥실 피어나고 있던 그 풋풋한 순간에
은희는 자꾸 사랑에 빠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행복해했다.
그런 반면 영수(황정민)가 거울을 보는 씬은 후반부였다.
도로 망가져버린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비춰보며 침을 뱉는 경멸의 순간들이었다.
사랑할 때의 자신을 들여다보길 좋아했던 은희.
망가져갈 때 비로소 자신을 들여다보았던 영수.
두 사람 참 다르다.
역시 아픈 사람이지만 은희가 영수보다 한 수 위다.
아파서 그런 걸수도 있겠다.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은희에겐
내일의 원대한 계획보다 오늘의 아기자기한 행복이 더 소중할테니깐.
셋.
임수정 인터뷰에서 이병헌이 시나리오보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비슷한 감성이지 않냐는 말을 했단다.
확실히 은희와 영수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조제> 생각이 났다.
은희와 영수는 서로 좋아서 동거했고,
영수는 은희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은희는 결국 영수를 보내준다.
짐을 담은 가방이 마루 위에 놓여져 있고, 아픈 은희와 뒤돌아서는 영수가
<조제>의 이별장면과 닮았다.
하지만 임수정이 <조제>보다는 담담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했듯이
은희는 엉엉 소리내서 울어버리고
나쁜 남자, 영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얼굴로 저벅저벅 그 집을 뒤돌아서 나온다.
<조제>의 사토시처럼 뒤돌아서서 한번 울어줬더라면
영수를 그렇게 미워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너무 못됐다. 나쁜놈. 영수.
넷.
<봄날은 간다>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나,
<외출>의 우리 확 사귈래요 따위의 귀에 쏙 박히는 대사는 없었지만
<행복>에 아기자기한 대사들이 많았다.
박인환의 담배에 대한 대사.
영수를 요양원 사람들이 병명 '강경변'으로 불러대던 장면들.
은희의 뽀뽀를 하고 있는데도 뽀뽀가 왜 하고 싶지, 라는 대사.
거기에 영수의 그런 것도 있구나, 했던 장면.
감독 본인의 경험에서 나왔다는 정력에 좋다는 부추 대사.
등등.
그 중에서 내게 가장 사랑스러웠던 대사는
귀여운 은희가 영수에게 가서 혈액형을 물어보던 장면.
은희가 혈액형이 뭐냐고 하니까 영수는 O형이라고 하고.
영수가 은희씨는 뭐냐고 하니까
저는 원래 O형이였는데요. 아프고 나서 A형으로 변했어요.
그래서 원래 활달했었는데요 소심해졌어요.
하는 대사.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무튼 임수정이 역대 영화들 중에서 가장 예쁘게 나오던 영화다.
최고최고. 임수정의 얼굴에 반했다구.
몸빼바지 입어도 이쁘고. 부러워요. 정말 예쁜 수정씨. :)
2007/09/21 - [극장에가다] - 영화 <행복>을 보고 투덜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