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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를쌓다 2021. 5. 8. 01:41

     

     

      점심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늘 양조절에 실패하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되는 양으로 요리를 만들고 나면 늘 많다. 지나치게 많다. 바질 페스토와 뽀모도로 시판 소스로 만든 파스타였는데 맛있었다. 양이 어마어마했는데 다 긁어 먹었다. 그리고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보다 자연스레 낮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보통 낮잠은 길게 자도 한두시간 정도였는데 다섯시 넘어서까지 아주 꿀잠을 잤다. 그래서 오늘 밤잠은 당연히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요즘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고 자려고 노력하느라 힘들었는데 이렇게 아예 놓아버리니 좋으네. 물을 끓였다. 얼마 전에 산 카페인 없는 포틀랜드 차를 우려냈다. 스탠드도 켜고 음악도 틀었다. 오늘은 이렇게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다 자야지. 저녁은 민정이 인스타 보고 급 땡긴 바베큐치킨이었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양념 잔뜩 묻은 치킨을 뜯으며 이번주 본방을 놓친 <로스쿨>을 보고 극장에서 상영할 때 보고 싶었던 김향기가 나오는 <아이>를 봤다. 김향기는 또래의 다른 아역 배우 출신들과 확실히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김향기가 나오는 영화라면 분명 따듯한 영화일 거라 생각하게 됐다. 이번 영화 역시 그랬고. 

     

      사실 김민철 씨의 팬이지만 이 책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녀온 여행들에 대한 편지글이라고 해서 다른 책들보다 빨리 쓰지 않으셨을까 생각했더랬다. 다 읽고 보니 다른 책들보다 쓰는 동안 무척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행복하게 읽었기 때문에. 표지에 쓰인 쨍한 색들이 너무나 여행 같아서 이 책을 가지고 다닐 때 표지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김민철 씨는 이 책에서 스물 여섯 통의 편지를 쓴다. 그 편지의 대상은 여행을 함께 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제일 인상적인 대상은 작가의 동생 분. 작가님은 군대 제대를 한 동생에게 큰 선물을 한다. 밤을 새가며 번 소중한 월급을 쪼개서 유럽행 비행기표를 선물한 것. 이유는 "뭔가 내가 해본 경험 중에 제일 좋은 걸 너에게도 주고 싶"어서. 영어도 한마디 할 줄 모르고 돈도 얼마 가지고 가지 않았던 동생은 돌아오는 표를 계속해서 늦추다 거의 두 달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다. 돌아온 동생은 누나에게 말한다.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탄 밤에 대해. 

     

      "그 비싼 걸?" 하며 놀라던 나에게 너는 이야기를 이어갔지. 돈이 없었지만, 저건 꼭 타봐야겠다 싶어 사람들을 모아 밤에 곤돌라에 올랐다고. 그러다 문득, 곤돌라 바닥에 누웠다고. 눈에 보이는 건 까만 하늘과 별 그리고 베네치아의 좁은 건물들. 들리는 건 촤락 착, 촤락 착, 노에 물이 부딪치는 소리뿐.

      모든 것이 사라졌을 거야. 기쁨이니 슬픔 같은 구체적인 감정도 사라졌을 거야. 오롯이 밤과 물과 너밖에 남지 않았을 거야. 기이한 진공 상태가 되어 버린 거지. 그러다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밀려와서 너를 가득 채운 게 틀림없어. 그 고요하고도 가득한 경험 속에서 눈물을 흘려버렸다고 그랬잖아. (p. 55-56)

     

      나는 네가 들려준 이 이야기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몇 번을 곱씹었는지 몰라. 세상에서 너보다 더 베네치아를 멋있게 즐긴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거든.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너라면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과 그곳의 명품들 혹은 밀라노의 화려한 성당 앞으로 펼쳐진 으리으리한 상점들을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밤의 곤돌라라니. 그 한순간을 만나기 위해 그 비싼 티켓을 사고, 그 고생을 해가며 여행을 떠난 걸지도 몰라. 그 한 순간만으로도 여행의 의미는 다 충족되고도 남아. (p.57)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는 그런 여행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읽는 내내 행복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혼자 멀리멀리 떠난 것. 그 끝에서 외롭기도 하고 충만하기도 한 어떤 감정의 벅참 때문에 꺼이꺼이 울어본 것. 다시 돌아와 일상에 적응한 것. 그리고 다시 떠난 것. 

     

      회사에서 한달에 십만원 정도 자기계발비가 나오는데 휴직 전 한동안 받지 못할 자계비를 여행에 온전히 쓰고 싶었더랬다. 좋은 숙소에 가고 싶었고 풍광이 좋은 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더랬다. 결국 코로나와 몸 상태로 가까운 서해밖에 못 갔지만. 대신 세 달치 자계비를 탈탈 털어 책을 구입했다. 이렇게 책으로 가득찬 무거운 박스라니. 부지런히 읽어야지. 남희 언니에게 임신소식을 어떻게 전할지 몇달 째 고심하고 있었는데 언니가 SNS에서 보고 먼저 택배를 보내왔다.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며 임신 정말정말 축하한다고. 언니에게 조카가 한 명 있는데 이제 이사를 고려할 때 조카를 자주 볼 수 있는 거리를 우선으로 생각할 정도로 엄청나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언니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새로운 세상! 홀 뉴 월드- 세상 둘도 없는 친구를 갖게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해." 언니가 보내준 책의 제목은 <행복의 가격>. 이제 책 읽다 천천히 잠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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