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리

from 극장에가다 2018.12.05 12:24




   휴가 첫날. 늦어서 택시를 탔다. 커다란 횡단보도를 건넌 뒤 모범택시 바로 뒤에 오는 개인택시를 잡았다. 자켓 차림에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넘긴 기사님이었다. 목적지를 말했다. 택시 안은 라디오 소리만 들리고 조용했다. 우회전을 했다. 기사님이 입을 여셨는데, 실은 계속 직진을 할 줄 알았다고 했다.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던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택시를 잡길래 직진손님인 줄 알았다고. 뭔가 정중하게 이야기 하셔서 나도 모르게 죄송해요, 라고 말했다. 기사님이 아니예요, 라며 영화 보시러 가시나봐요, 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틀어놓은 티비로 예능 프로그램이 나왔고, 한때 이 예능에 출연했던 정치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지금도 그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라고 반문하니, 있지요, 라며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주셨다. 가족한테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국민들에게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겠어요, 가 기사님의 요지였다. 택시는 더이상의 우회전 없이 극장이 있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내리겠다고 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인사를 하고 내렸다. 기사님은 아마도 좌회전을 하고, 또 좌회전을 하고, 마지막으로 우회전을 한 뒤 직진을 할 것이다. 집에 가면 따뜻한 한 상이 차려져 있을 것이고, 밥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돈을 벌러 길을 나설 것이다.

   <출발 비디오여행>에서 이 영화를 소개해줬다. 샤를리즈 테론은 이 역할을 위해서 또 살을 찌웠다고 했다. 티비에서 보여준 이야기는 이렇다. 샤를리즈 테론에게 두 명의 아이가 있고, 셋째를 임신 중이다. 집안살림이 넉넉한 편도 아니고, 둘째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다. 출산을 앞둔 어느 날, 부자 오빠가 야간보모를 구해주겠다고 한다. 출산선물이라고. 밤부터 아침까지, 갓 태어난 아가가 시도때도 없이 울고 배고파할 그 시간 동안만 집에 와서 보모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잠이 깬 아가를 돌보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배고파하면 침실에 가 엄마의 젖을 물려주고, 지저분한 집을 청소해주고, 둘째아이를 위해 컵케잌도 구워주고. 처음엔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긴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거절했는데, 생활이 너무나 힘들어지자 결국 전화를 한다. 야간보모는 첫날부터 너무나 능숙하고 다정하게 샤를리즈 테론과 아이를 대한다. 덕분에 샤를리즈 테론은 꿀잠을 자고, 컨디션을 나날이 회복해 간다. 어느 날, 야간보모가 말한다. 나는 아기 뿐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도 온 거예요. 그리고 자신을 돌보라고, 행복과 즐거움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렇게 조금씩 기쁨이 쌓여가던 어느 날, 보모 툴리는 이제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이 밝혀지고 나면 슬픈 마음이 든다. 병원에 있던 샤를리즈 테론에게 툴리는 말한다. 자신을 더 많이 돌보라고. 샤를리즈 테론은 말한다. 당신이 나이가 더 어린데 왜 더 어른 같죠? 툴리는 말한다. 이십대에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그러니 나를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어요. 우리는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를 거쳐, 사십대가 된다. 이 영화는 그런 이야기이다. 삼십대를 위로해주는 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사십대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겪어 너무나 잘 아는 이십대라는 그런 이야기.

   영화를 보고 남자친구를 만나 택시 아저씨 이야기를 해줬다. 남자친구는 가만히 듣더니 가족한테도 견디기 힘든 말을, 견디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주위에 그런 사람이 정말로 없었느냐고, 그런 순간이 살면서 단 한번도 없었느냐고 물었다.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있었어. 그건 아직도 나한테 상처야. 그 정치인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잘못되었지만, 우리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어떤 말을, 어떤 행동을 하면서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말도 안되게 가족이니까 그런 말들을, 행동들을 잊어버리고 서로를 돌보게 된다고. 다들 죽을듯이 힘든 순간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가 걸어온 지난 날을 되돌아보니 괴물이 되지 않고 잘 살아왔다. 샤를리즈 테론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의 사십대도 괜찮을 것이고. 더 나를 더 들여다보고, 즐거움과 행복을 어제보다 조금씩 더 찾아가다보면 가끔씩의 상처쯤은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보면 괴물이 될 리는 없다.

   이번 휴가는 멀리 가지 않고, 좋은 영화를 보고, 잠을 많이 자고, 좋아하는 예능도 다시 보고, 병원도 다녀오는 일정을 소화 중이다. 책도 많이 읽고, 일기도 자주 쓰면 좋겠다. 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