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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의 시간들
    극장에가다 2018. 11. 17. 08:12




       올해 건강검진은 늦었다. 접수 데스크에 가니 늦게 오셨네요, 했다. 오전 시간에만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다음날 Y씨에게 물어보니 7시까지였단다. 9시 넘어 도착했으니 확실히 늦었네. 하지만 느즈막히 끝난 덕분에 근처 골목길에서 생선구이 정식을 점심으로 먹고, 아빠와 간만에 통화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이수역으로 가 이 영화를 봤다. <집의 시간들>. 어느 영화의 예고편에서 보았는데, 아파트가 커다란 나무에 둘러쌓여 있는 풍경이었다. 여름이었고, 초록색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파트를 감싸고 있는 나뭇잎들이 일제히 쏴아-하고 움직이니 마치 그 아파트 자체가 살아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그 예고편을 보고, 개봉하면 꼭 봐야지 하고 개봉일도 알아뒀는데, 개봉관이 많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더랬다. 시간표를 확인하고, 이 날이 아니면 못 볼 것 같아 이수역까지 갔다. 


       <집의 시간들>은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음성과 손때가 담긴 다큐영화이다. 둔촌동이 어디인지 몰라 찾아보니 그랜드민트페스타 때마다 찾았던 올림픽공원 근처에 있었네. 이렇게 멋드러진 아파트 단지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가끔 산책하러 갔을텐데. 내가 영화를 통해 본 둔촌주공아파트는, 그리 높지 않은 나즈막한 동들이 모여 있고, 주변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살려 나무들이 많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쉼터 공간들이 많았다. 영화의 풍경은 여름이었는데, 음성으로 등장한 주민의 말에 의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단다. 오래된 나무들이 얼마나 키가 큰지 아파트 거실창에서 손을 뻗으면 초록색 잎들이 손에 닿을 듯 했다. 그러니 거실창은 사계절 내내 한 폭의 그림이라고 했다. 이 뷰를 두고 떠나는 게, 어디를 가도 이 뷰를 만날 수 없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제일 안타깝다고 했다. 


       영화는 오래된 아파트의 재건축을 앞두고 있었다. 각자의 이유로 무척 사랑하고 있는 아파트라 재건축이 너무너무 안타깝지만, 그리하여 피하고 싶지만, 오래되어 기본적인 생활문제로 힘든 것이 있다고 했다. 단수가 자주 되고, 녹물이 계속 나오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 재건축이 되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살릴 수가 없을테니 모두들 아쉽고, 이 모습을 제대로 마음에 담아두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 영화 자체도 그런 마음으로 만든 것이기도 했다. 영화는 이 곳에 산 사람들의 음성으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음성이 흐르는 동안 그이들의 손때가 묻은 아파트 구석구석을 비춰준다. 잘 가꾼 화분의 꽃도 있고, 어린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도 있고, 부엌의 풍경도 있다. 아파트의 전체 풍경을 비춰줄 때 현관문을 환히 열어둔 집이 꼭 하나 이상 있었다. 환히 열어두고, 나무들 때문에 벌레가 많아 방충망을 내려두고.


       제일 인상깊었던 주민은 어릴 때 이곳에서 살았다가 부모님의 일 때문에 외국에서 2년정도 거주했던 젊은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지내는 동안 늘 불안했다고 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2년 뒤에 공항에서 내려 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을 때, 쭉 펼쳐진 길의 끝에 이 하얀 주공아파트 단지가 보였을 때 비로소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왔구나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학창시절에 또 다른 아파트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이는 늘 언젠가 꼭 둔촌주공아파트로 다시 돌아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고, 몸과 마음이 지친 어느 시기, 아파트 생각이 났단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공간이 한 사람에게 이렇게 큰 의미로 남을 수도 있구나. 이곳의 나무들을 보면 이해가 되더라. 이런 공간이라면, 언젠가 내 생에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들만 하더라. 


       한번쯤 내 생애 (다시) 살아보고 싶은 공간. 이런 곳을 찾는 것이 목표가 되면 어떨까. 영화를 보고  생각해봤다. 좋았다, 집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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