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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밤 중에 잼을 졸이다
    서재를쌓다 2017. 11. 19. 08:59




       퇴근길에 깐밤을 만원 어치 샀다. 오천원 어치씩 포장이 되어 있어서 하나를 살까, 둘을 살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하나는 부족한 거 같아 두 개를 샀다. 집에 꿀도 있고, 우유도 있다. 며칠동안 생각한 밤잼을 만들어 보았다. 깐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한번 끓였다. 드문드문 붙어 있는 밤 껍질을 정리해 주고 으깼다. 살짝 식힌 뒤에 우유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밤이 퍽퍽해서 잘 갈려지지 않더라. 그렇게 간 밤우유를 냄비에 다시 넣고 끓였다. 꿀을 듬뿍 넣었다. 오래 끓일수록 냄비 밖으로 밤꿀우유가 튀여서 뚜껑을 덮어 뒀다. 그러다 타지 않나 뚜껑을 살짝만 열고 주걱으로 바닥을 뒤적거려 줬다. 또 덮어 두고, 또 뒤적거려 줬다. 잼을 만드는 것은 이 일의 반복이구나 생각했다. 그 시간이 은근히 길어서 그 사이 책도 몇 페이지 읽고, 티비도 보고 그랬다. 티비를 보면 정신이 팔리니, 책을 읽으면서 잼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페이지 읽고, 뒤적거려 주고, 한 페이지 또 읽고, 뒤적거려 주고. 얼추 시중의 잼과 비슷한 농도로 걸쭉해졌을 때 불을 껐다. 집 안 가득 달달한 밤냄새가 가득해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줘야 했다. 한밤 중은 아니지만, 밤의 잼이 완성되었다. 요즘 빵을 줄이려고 하고 있어서, 다음 날 아침, 우유를 몽글몽글하게 데워 밤잼을 조금 넣어 마셔 보았다. 따뜻하고 적당히 달달한 것이, 배가 든든해졌다.


       밤잼을 만드려고 결심한 것은, 순전히 이 책 때문이다. 몇달 전 박찬일 쉐프의 강연회를 갔다. 음식에 대한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한 강연회였다. 강연회는 생각보다 지루했는데, 그 강연회에서 얻은 건 박찬일 쉐프의 추천책 목록이었다. 박찬일 쉐프는 책 한 권 한 권 설명해주면서, '재미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오래된 고전 소설을 말하면서도 재밌어요, 전공서 같은 느낌의 책을 추천하면서도 재밌어요. 그 재밌다는 말이 참 좋더라. 그래서 나도 '재미있게' 다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도 그 목록에 있었는데, 제목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사 놓고는 한동안 책장에 꽂아 두었다. 어느 날, 한번 읽어볼까 하고 책장에서 꺼냈는데, 왠걸 첫장을 읽자마자 너무 좋은 거다. 어떤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려 보자. 그 음식에서 느껴지는 맛을 또 떠올려 보자. 그것을 글로 써보자. 그러면 알게 된다. 음식의 맛을 표현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이 분, 그러니까 히라마쓰 요코는 그걸 아주 잘 해낸다. 단번에 그 음식을 찾아가, 혹은 만들어 먹고 싶게 만든다. 음식과 그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가 담긴 책이다. 문장들이 좋다. 책을 읽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로 되돌아가 보니, 이런 소개가 있었다.


    "유명 레스토랑 음식에 별점 매기는 일보다는 퇴근 후 서둘러 집에 돌아가 해 먹는 밥 한 끼의 매력, 도시 변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매일의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요리사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인정 넘치는 밥상을 손쉽게 차릴 수 있는 고유의 레시피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별거 아닌 식재료도 그녀의 미각과 손길을 거치면 마법처럼 생생한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소개도. "그중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은 소설가 야마다 에이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제16회 분카무라 되 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성 짙은 글쓰기는 탄탄한 독서 이력이 밑거름되었다. 독서에세이 <야만적인 독서>로 제28회 고단샤 에세이상을 수상했고."


       나는 이 책을 찬찬히 읽고, 그녀의 책 두 권을 더 주문했다.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은 몸이 힘들 때 읽으려고 아껴두고 있다. <한밤 중에 잼을 졸이다>를 읽으면, 우리가 무심하게 먹던 밥과 소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들을 마트에 가서 함부로 고르지 말아야겠구나 생각이 든다. 계절에 맞는 제철음식을 고르고 골라 그 맛을 충분히 느끼면서 먹어야겠구나 생각이 든다. 이제 그만 사먹자는 생각도 든다. 시간을 들여 요리를 하고, 그 요리를 과정들을 충분히 느끼면서 먹는 그 시간들을 되찾고 싶어진다. 내가 포스트잇을 붙여둔 부분에 이런 맛들이 있다. 매일 사용해서 길들이는 옻그릇, 처음 술맛을 보고 바로 따라 버린 고등학교 시절, 여름의 맛 백도, 무엇보다 내가 어떤 밥을 짓고 싶은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한 솥밥, 초여름 6시 반에 짓는 새벽밥, 밤이 열리는 계절에 변함없이 전화를 걸어 주문하는 밤과자, 냄새를 맡으면 언제나 행복한 카레카레카레, 냉장고 안 여름 맥주, 멀리서 들려오는 축제 북소리와 함께 하는 한여름의 야키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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