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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를 보지 않으니, 내가 그동안 티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뺏기고 있었는지 알겠다. 뉴스랑 예능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퇴근하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 부족했는데, 이제는 넉넉한 건 아니지만 뭘 더할까 생각해보는 시간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일찍 자버리기 일쑤지만. 이번주에는 그럴 때 <아버지와 이토씨>를 틀어뒀다. 나는 좋아하는 장면이나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는 걸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앞부분을 반복해서 봤다. 그레고리우스가 새벽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 시간을 보내는 모습. 혼자서 두 명 분량의 체스를 두는 것이나, 티백이 떨어져 어제 마셨던 티백을 찾아내 다시 우려내는 것. 그 쓸쓸하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모습을 반복해서 본다. 그리고 다리에서 떨어져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하고, 그녀와 함께 걷고, 황급히 떠나가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어떤 강력한 이끌림으로 그녀를 찾아나서고, 그녀가 읽던 책을 발견하고, 결국 그녀가 타려고 했던 열차가 출발하는 바로 그 순간. 이 열차를 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그레고리우스 양 손에 두 물건이 있었다. 한 권의 책과 한 장의 열차표. 사실 여행을 시작하기에 그것이면 충분한 것이다. 고민하던 그레고리우스가 결심을 하고 열차에 올라탄 순간! 이 장면은 정말이지 반복해서 보아도 단 한번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이토씨>도 반복해서 보아도 지루하지 않은 오프닝이었다. 34세의 아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54세의 이토씨를 만났다. 이토씨도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함께 술을 마시게 되고, 또 한번 술을 마시게 되고, 또 한번 술을 마시게 되다, 어느 날 같이 살게 되었다. 아야와 이토씨가 마주보고 앉아 밥을 함께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야는 이토씨를 한번 보고, 이토씨 뒤에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한번 본다. 그리고 이런 나레이션이 나온다. 우린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집의 풍경이 보여진다. 하늘색 천으로 잘 덮혀져 있는 티비라던가, 거울 너머로 창밖 풍경이 비치는 좌식 화장대라던가,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현관의 명패라던가, 이토씨가 정성껏 꾸미는 집앞 텃밭이라던가.
뒤로 갈수록 '나름' 스케일이 커지지만, 영화는 일상의 소소한 부분을 다룬다. 물론 커다랗고 심각한 문제는 영화의 중심에 굳건히 버티고 있다. 배우자가 죽고 혼자 남겨진 노령의 남자. 자식들은 남자를 모시기 불편해 하거나 힘들어하고, 남자는 노령이라 혼자 살기는 힘들다. 남자는 고집이 세고, 자신의 의사가 확신한 사람. 가족들을 위해 40여 년 동안 열심히 일해왔다. 남자는 고생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아 서운하고, 자식들은 자신들의 사정으로 난처하다. 그런 상황에서 아야와 이토씨, 그리고 아버지가 함께 살게 되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늘 저녁밥은 가족이 함께 먹어야 된다는 신념이 있어 세 사람은 항상 저녁을 함께 먹는다. 사오거나 하지 않고, 직접 만들어 먹는다. 직접 삶은 메밀소바, 직접 튀긴 돈까스, 낫또와 반찬들 등등. 이 일상들이 좋으다. 그리고 결론도. 내가 결론을 정확하게 이해한 건지 헷갈리지만, 그래서 인터넷에 '아버지와 이토씨 결말'이라고 검색도 해봤는데 거기에 명쾌한 답은 없었다. 그래서 검색창을 끄고 내가 생각했던 그것으로 결론지었다. 세 사람은 함께 계속 저녁밥을 먹게 될 것이다. 때론 다투고, 때로는 함께여도 쓸쓸하고, 때론 더없는 충만함을 느끼고, 그때 아버지를 잡길 잘했다 안심하면서.
D-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