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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돼지꿈 - 새로이 시작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어려운
    서재를쌓다 2009. 6. 7. 20:47

    돼지꿈
    오정희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친구는 요시다 슈이치를 만나는 자리에서 이 책을 가지고 왔다. 나를 만나러 오다, 나를 기다리다 산 책이라 했다. 짧은 글들이 담긴 책인데, 내가 오는 동안 몇 편을 읽었다고 괜찮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날도 비가 왔다. 우리는 요시다씨를 만나고, 우산을 펴고 우겹살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언제였더라. 김동영 작가를 만나는 날이었던가. 친구는 또 한 번 이 책 이야기를 꺼냈었다. 다 읽었다고, 아주 좋았다고, 너도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책 속의 어떤 한 소설의 느낌을 이야기해줬는데, 나는 요시다씨를 만난 뒤 잠깐 들른 커피숍에서 읽었던 이 책 속 작은 은점이(작고 강한 아이다)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내 친구가 말해준 그 이야기 때문에 이 책이 빨리 읽고 싶어졌다. 그건 오정희 작가가 쓴 이야기였지만, 오정희 작가의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훗날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 책의 거의 모든 소설이 그렇다. 제목은 '아내의 30대'. 소설의 처음,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새벽녘 아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 화자인 남편. 이건 아내의 이야기인데, 남편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더 서글펐고, 더 이해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눈물이 핑 돌면서 웃음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새벽녘 아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아내는 이불을 덮어 쓰고 울고 있다. 남편은 아내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묻는다. 아내는 자신도 자기가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흐느끼며 말한다. 그리고 가끔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고. 숨도 못 쉬겠다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될 거라고.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인생이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남편은 연애시절, 신혼 초의 여린 아내의 눈물을 생각한다. 그 때는 그 눈물에 자신이 항상 졌다고, 그건 여자의 무기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의 눈물에 대해서도 말한다. 결혼 생활이 길어지고 이제 싸우는 중에도 울지 않는 아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제 남편은 아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항복하지 않는 것이다. 화해의 과정이 없어도 생활은 계속되는 것. 더이상 '이른바 눈물의 정화작용 화해 과정이 없'는 것. 남편에게 이제 아내의 눈물은 여자의 눈물이 아니다.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빨리 넘겨야 할지 궁리하는 위기상황일 뿐이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고,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려온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다. 그러자 아내는 눈물을 뚝 그친다. 아내는 빨래를 걷어야 한다. 이제 곧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고, 아침밥도 해야 하고, 남편을 출근시켜야 한다. 다시 아내는 현실로 돌아오고,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 '아내는 30대 중반인 것이다. 새로이 시작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어려운.'

         이 짧은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여자라면, 친구처럼 가정을 가졌거나, 나처럼 가정을 가지지 않은 여자라면. 그리고 우리처럼 30대로 접어들었다면. 그리고 나처럼 가끔씩 인생이, 아니 자주, 때때로, 이따금 허무할 때면, 쓸쓸할 때면, 외로울 때면. 친구와 나처럼,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경우라면 읽어 볼 만한 이야기다. 아니, 읽어보았으면 하는 이야기다. '여자'의 경우를 '남자'로 바꿔도 마찬가지. 1분 1초의 쓸쓸함을 견뎌내고 있는 당신에게, 그리고 30대도, 여자도, 엄마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소나기가 쏴악- 하고 내리는 날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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