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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랜 토리노 - 완벽한 토요일 밤
    극장에가다 2009. 3. 22. 16:32

       어제는 모든 게 완벽한 밤이었다. 토요일이었고, 낮에는 날씨가 좋아서 집에 있는 모든 창문들을 열어뒀다. 창문과 창문 사이로 봄바람이 불었다. 기분 좋은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걸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컴퓨터로 볼륨을 크게 올려놓고 조원선의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들었다. (뮤직비디오에 '무려' 메리이모들이 '꽤' 길게 등장한다) 그러다 선물받은 화분이 생각나, 집에 있는 예쁜 화분으로 옮겨 심었다. 그 화분을 창가에 두고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주에 좋지 않은 기분들이 모조리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지난 주에 들었던 기분 안 좋은 말들, 표정들, 공기들 모두.

        그러다 <그랜 토리노>가 보고 싶어 예매를 했다. (내겐 '무려' 4천원 할인권이 있었다) 원래는 일찍 출발해서 중랑천을 걸어 건대까지 갈 계획이었는데, 배고플 거 같아서 볶음밥을 만들어먹고 출발하려고 보니 벌써 시간이 제법 되어 버려서, 지하철을 타고 갔다. 극장에 도착해 영화 보기 전에 VIP라운지에 들러 VIP쿠폰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친절한 직원은 그렇다고, 아직 못 받으셨나요, 라면서 내게 쿠폰을 건네줬다. (지난 번보다 더 좋은 건, 2000원 할인 쿠폰이 들어있다는 사실. 엔제리너스 커피 한 잔 마시면 한 잔 더 주는 1+1 쿠폰도 있다. 아싸!)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들고 올라와 영화를 봤다. 좌석이 거의 매진이었는데, 내 옆 두 좌석이 비어있었다. 그것마저도 좋았다. 내 자리는 복도 끝 좌석. 그것도 좋았다.

       영화는. 영화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잖아. 먼저 이 영화를 본 H씨는 내게 이 영화를 보면 내가 많이 울 거라고 말했었는데, H씨의 말대로 나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계속 울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정말 엉엉 울었다. 이 영화는. 이 영화는. 정말 꼭 봐야한다. 다음주부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꼭 이 영화를 보라고 말하고 다닐 생각이다. 사실 영화는 생각보다 잔잔했다. 예고편을 봤을 때, 나는 실제 영화보다 더 무지막지한 일들이 펑펑하고 터질줄 알았다. (예고편 속의 손가락으로 총을 만들어 쏘아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표정)
    영화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 월트는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늙고 고집된 노인이며, 인종차별주의자에, 친구라곤 자신과 같이 늙은 개와 맥주뿐이다. 가끔씩 술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하지만, 그의 일상은 거의 대부분 집 앞에서 맥주를 마시고, 신문을 읽는 것뿐이다. 그런 월트의 옆집에 몽족 가족이 이사를 오고, 그 집의 수와 타오로 인해 월트의 남은 여생이 바뀐다.

       마지막 장면 말이다. 그러니까 그 결전의 날. 월트가 폭탄이라도 펑 터뜨릴 줄 알았던 그 날 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는 마음 속에 어마어마한 위력의 폭탄이 펑하고 터졌을 게 분명한 그 날 밤 말이다. 그 장면을 위해서 우리는 이 영화를 봐야 한다.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이어지는 영화의 진정한 마지막 장면을 (음악도) 끝까지 감상하고 극장을 나와야 한다. 아, 늙는다는 게 이렇게 멋진 일이구나, 요즘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를 보면서 느낀다. 나도 그만큼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그만큼 인생을 보는 눈이, 가슴이, 열정이 생겼으면 좋겠다. <체인질링>에 이어 나를 울린 클린트 이스트우드.

        다시 이어지는 완벽한 토요일의 밤. 극장을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좀 걸으려고 했는데, 우산도 없어서 그냥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그 전날 보고 홀딱 반해버린 <도쿄 소나타>에서 들은 드뷔시의 '달빛'을 엠피쓰리로 들으면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지하철역에 있는 다이소에 들어가 천원짜리 튼튼해보이는 맥주잔을 샀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는 맥주 한 병을 샀다. 씻고, '명랑 히어로'를 보면서 맥주를  튼튼하고 예쁜 천원짜리 컵에 따라 벌컥대며 마셨다. 한 병을 다 마시고 나니, 스르르 잠이 왔다. 이불을 덮고 누웠다. 작은방에서 컴퓨터를 하다가 들어온 동생이 텔레비전을 꺼주고, 불도 꺼줬다. 그렇게 꿈나라로. 좋은 꿈을 꿨는지 안 꿨는지 기억이 안 난다. 꽤 괜찮은 꿈을 꿨을 거다. 아마도. 완벽한 토요일밤을 보냈으니까. 아, 그리고 오늘은 인터넷을 뒤져 마지막 엔딩 부분에 나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읊조림이 들어간 음악을 발견하고, 내내 듣고 있다. 아, 이 곡도 정말 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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