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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인어공주 - 너는, 알리사
    극장에가다 2008. 11. 1. 17:30

    (스포일러 있어요)


       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지 않아 다행인, 우리의 인어공주, 알리사가 기분이 막 좋아져서 싱글벙글 도시의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질주해요. 걷는데 뛰는 것과 비슷한 속도 있죠? 기분이 막 좋으면 그러잖아요. 뛰기엔 숨차고, 걷는건 너무 느려 참을 수 없는 거죠. 거긴 도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알리사를 스쳐 지나가요.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고.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너무 우울해진 거예요. 우린 분명 아주 발랄하고 귀여운 인어공주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비루한 현실이 녹록히 보이는, 인어공주가 사라지고 남은 바다의 거품같이 우울한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그날 밤, 잠들기 전 영화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본 거예요. 도시의 거리를 기분 좋게 질주하는 알리사를요. 그리고 내 마음대로 그 장면을 재구성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거예요.

       알리사는 기분이 좋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덕분에 죽지 않았거든요. 무엇보다 자신의 슬픔을 그 사람이 걱정해 준 거예요. 그 사람이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는 건, 그렇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알리사는 신났어요. 지금 알리사는 비루한 현실의 거리를 뛸듯이 기쁘게 걸어가고 있어요. 이 복잡한 거리에 알리사만 빛나는 거예요. 도시의 거리가 늘 그렇듯 사람들이 많아요. 오늘도 그렇죠. 어떤 사람과는 어깨를 부딪치기도 해요. 자, 이제 알리사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거예요. 알리사는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서 보지 못하지만, 나는 볼 수 있어요.

        첫 번째 아이가 보여요.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음료수 뚜껑을 엄지발가락에 끼워넣고 피나는 줄도 모르고 포즈를 취하는 아이. 둥글게 오므린 손 끝이 아주 행복해보여요. 두 번째 아이도 보여요. 일식이 있었던 날, 1부터 20까지의 숫자를 마음 속으로 세고 영영 입을 다물기로 다짐한 아이죠. 말을 할 수 있지만,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예요.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버린 아이이기도 해요. 

        저 아이는, 말없이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며 걷는 저 아이는, 마술을 할 줄 알아요. 저 아이가 사과나무를 뚫어져야 바라다보고 있으면 사과가 뚝하고 떨어져요. 우연의 일치라구요? 천만의 말씀. 이건 마술이라구요. 그 마술 안 봤으면 말을 마세요. 네 번째 아이가 보여요. 표정이 밝지만, 사실 저 아이에겐 방금 태풍이 휩쓸고 갔어요. 진짜 태풍이요. 그래서 저 아이는 바닷가의 작은 집을 잃었죠. 그런데 왜 저렇게 표정이 밝냐구요? 그건 드디어, 이 바다를 떠나 도시로 떠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예요.

        그리고 다섯번째 아이. 전화기 탈을 뒤집어 쓰고 기우뚱거리며 걷는 아이. 도시는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예요. 돈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봐 주지 않아요. 탈을 쓰고 내다보는 세상은 조금 달라요. 차라리 그게 더 안심이 되죠. 내가 아닌 나. 나를 숨길 수 있는 나. 사람들은 그냥 나보다 탈을 쓰고 있는 나를 더 좋아해요. 슬픈 일이예요. 그리고 쓰윽쓰윽 바람소리를 내며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방금 강물에 뛰어들어 흠뻑 젖어 오들오들 떨고 아이. 맥주탈을 뒤집어 쓴 아이. 모두 다 눈치챘겠지만, 이건 모두 나예요. 인어공주, 알리사라구요. 그리고 쾅. 인어공주는 행복했을까요?

       이건 달을 사모했던 아이의 영화예요. 그리고 달을 소유하려했던 남자의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달 영화라는 거예요. 이 영화 속 사람들은 달의 땅을 지구의 돈을 주고 사요.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이런 이야기는 어느 뉴스기사에서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해서 사람들은 뭘 얻는 걸까요? 소유하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 소유했다고 느끼는 걸까요? 아님 그냥 달의 꿈을 지구의 돈으로 사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낭만적인 거네요. 그러네요. 바보지만, 꿈이 있는 사람들이네요. 그 남자는 달의 꿈을 팔아 그렇게 부자가 된 거니까. 일식이 있던 날,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아이가, 말을 하고 싶게 만드는 달을 파는 사나이를 만난 이야기.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이 영화는 예고편에 반해서 보게 된 거예요. 실제 영화랑 예고편은 약간 차이가 있지만요. 영화 속에 예고편에 있는 영상들이 모두 나오긴 해요. 밝고 귀여운 아멜리에풍의 영화는 아니지만, 조금 우울해도 괜찮은 날이라면, 더 우울해지고 싶다면 한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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