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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구는 고양이다 - 당신도 나도, 기쁨도 슬픔도 나이를 먹어
    극장에가다 2008. 10. 24. 00:36


        영화를 보고 나서 이누도 잇신 감독 영화 중에 내가 못 본 영화가 뭐지, 기억을 더듬어 봤다. 검색해보니 본 영화를 추려보는 편이 더 빠르겠다. <조제...>, <메종 드 히미코>. <황색눈물>은 끝까지 다 못 봤으니까. 그리고 <구구는 고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금발의 초원>을 꼭 봐야지, 생각했다. 

        그런 대사가 나온다. 슬픔도, 구구도 나이를 먹는다. 물론 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내 가슴에 콕 와 닿은 부분은 슬픔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이가 드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 봤다. 심장이 터질 듯 엉엉 울어제치는 슬픔에서, 이따금 흐느끼는 슬픔을 거쳐,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또르르 눈물이 흘러 내리는 슬픔. 그리고 결국엔 미소를 짓게 되는 슬픔까지. 당신도 나도 나이를 먹고, 기쁨도 슬픔도 나이를 먹는다. 이건 정말 멋진 말이다. 

        이런 말도 등장한다. 고양이는 사람보다 3배 빠르게 늙어간다고. 그런데 우둔한 '사람'은 그걸 모른다고. 3배 빠르게 사랑하고, 3배 빠르게 헤어지고, 3배 빠르게 나이 먹고, 3배 빠르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니까 <구구는 고양이다>는 죽음에 관해, 외로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다.

        요즘 다시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한 나는 다른 좋은 영화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많이 웃고, 조금 울었다. 아, 가슴도 설레였다. 나는 진심으로 선생님의 사랑이 튼실하게 열매 맺어지기를 바랬다. 아, 사랑이 있었지. 사랑이 있었어, 라는 생각을 이 봄같이 따사로운 영화를 보는 내내 했다. 가을은 이별하기에도 좋은 계절이지만, 사랑하기에도 좋은 계절이니까, 사랑을 해야하는데 쩜쩜쩜, 이렇게까지 생각을 했다니까.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고양이 사바가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한 때였다. 영화의 첫 부분에 살짝 그 모습이 보였다가, 후반부에 선생님과 사바가 얼굴을 마주하고, 김이 폴폴 나는 주전자를 얹은 난롯가에서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생님은 사바가 좋아했던 음식들, 물건들을 눈가에 미소를 가득 띄우고서 이야기한다. 그러자 사바도 선생님이 좋아했던 시간들, 사람들, 슬퍼했던 순간들, 모습들을 마치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이야기한다. 그 때의 선생님의 표정. 그건 나는 늘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구나, 나는 외롭지 않은 사람이었어, 하는 느낌이다. 아주 작은 고양이에게서, 사람보다 3배 빠르게 살다 죽는 고양이에게서 받는 위로. 역시 우리 '인간'들은 너무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아주아주아주 행복해졌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만 키치조지를 사랑하게 되었고,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자그마한 고양이 한 마리도 키우고 싶어졌다. 이름은 사바나 구구가 좋겠다. 올해가 가기 전에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좋겠다고도 생각을 했고, 카세 료같은 남자면 더욱 좋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빌어봤다. 나는 외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언제고 내 앞에 나타나 따뜻한 김이 폴폴 나는 난롯가에 마주 앉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며, 사람들이며, 울음을 터뜨렸던 순간들이며, 그 순간의 자세 같은 것을 마치 1분 전의 바라보았던 일인듯 선명하고 따스하게 말해줄 사람이, 동물이, 아니 생물체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뭐라 덧붙일 필요도 없이 따뜻하고 좋은 영화다. 나는 요즘 계속 좋은 영화들을 만난다. 계절이 좋아서 그런가.

        아무래도 이누도 잇신 감독은 착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 것 같다. 그가 착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선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가까이서 그를 본 적이 있었는데, <조제...> 상영 1주년 행사 때였다. <조제...>를 너무나 사랑했던 나는 그 때 영화도 다시 보고, 감독과 조제 치즈루도 보는 행사에 참가했었는데, 이누도 잇신 감독은 조그만 캠코더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와 환호하는 우리를 환하게 웃으며 찍어대고 있었다. 이건 곧 일본에서 <조제...> 배우와 스텝들이 모이는 모임이 는데, 그 때 다같이 볼 거라면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었다. 그 선한 얼굴. 그러니 영화들이 다 이렇게 착하고 따뜻하지. 그러니 나는 또 다음 영화를 기다리고. 개봉하면 바로 달려가 봐야지. 

        아, 혹시나 영화 보실 분이 있다면. 우에노 쥬리는 주연보다는 조연이라는 말을 해드려야지. 드라마 <스이까>에도 나왔던 예쁜 만화가 선생님 코이즈미 쿄코가 주연이다. 카세 료도 아주 조금 나오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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