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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과 -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극장에가다 2008. 10. 19. 21:16


       토요일 밤 <사과>를 봤다. 동네 극장에 버스를 타고 가서 커다란 라떼 하나를 사 가지고 <사과>를 봤다. 2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당연히 술이 땡기고, 이야기가 땡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집에 들어가서 바로 쓰러져 자고 싶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나는 차 안에서 계속 우울하다,고 말했다. 

      <사과>는 전혀 우울한 영화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리뷰를 찾아 읽은 이동진 기사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많이 웃었다. 웃음을 멈추지 못해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는데도 낄낄거리고 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우울했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우울해져 버렸다. 마치 인생의 비밀 하나를 알아버린 스무살처럼.  

       동생은 말했다. 처음엔 내 생각이 나더니, 다음엔 언니 생각이 나고, 끝엔 동생 생각이 났어. 나도 그랬다. 처음엔 내 생각이 났다가, 다음엔 동생 생각이 나고, 끝에는 친구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사과>를 보면 누구든 떠올리게 될 거다. 오래전 헤어진 이성친구, 지금 사귀고 있는 애인, 가끔 징글징글한 내 배우자.

        일요일엔 육촌의 결혼식이 있었다. 바로 오늘. 나는 예쁘게 화장을 하고, 결혼식장으로 갔다. 내 마음대로 정말정말 늦게 결혼할 것 같았던 동납내기 내 육촌은 결혼식 내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찌나 크게 웃던지 그 아이의 잇몸을 처음 보았다. 울퉁불퉁하고 붉그스레한 그 아이의 잇몸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내내 지켜보고 있는데, 어제 본 영화 <사과> 생각이 났다. 하얀 카펫 위를 지나는 빼빼마르고 아리따운 신부를 보고 있노라니 더 그랬다. 내 육촌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너 그 여자를 평생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어?

       영화 <사과>에서 김태우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비올 확률이 10%라고 나들이를 갔지만 금새 소나기가 내리고, 이제는 초소를 지키는 장병들이 없노라고 방금 말했는데 그 길로 군인아저씨들이 떼지어 등장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신통치 않은 사람이 문소리에게 빠졌다. 문소리는 아주 오래 사귄 사람과 헤어진 직후였다. 너는 이제 내 생각하지 않겠지?, 라고 시작하는 메일을 써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별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결국 문소리는 김태우랑 결혼한다. 재미없는 남자. 늘 정답을 맞추지 못하는 남자와. 거기서 영화는 끝나는게 아니라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김태우가 믿음직스러웠다. 날씨도, 가정도, 직장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남자였지만, 나는 그가 이해가 됐다. 바보스럽지 않았다. 내가 아는 아빠들은 대개 그랬다. 

       이 영화가 왜 이렇게 늦게 개봉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이건 좋은 영화야. 다시 보고 싶은 영화야. 나는 김태우도 이해하고, 문소리도 이해하고, 이선균도 이해했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이 영화는 연애의 시작도 보여주고, 연애의 끝도 보여주고, 결혼의 시작도 보여준다. 결혼의 끝은, 보여주지 않는다. 흠. 결혼이란 건 사랑만으로 평생 이루어지지 않는 거 같다고, 누가 내게 긍정적인 어조로 말해줬다. 그걸 유지시켜주는 건 정인데, 그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오늘 나는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는 방에 앉아서 양주를 마시고 SES의 애인찾기를 불렀다. 웃길려고, 분위기를 살릴려고 부른 거였는데, 부르는데 내 기분이 좀 그랬다.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사랑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영원히 행복한 결혼은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결혼은 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는 영원한 사랑과 행복한 결혼을 꿈꾸는 사람이다. 믿지 않지만, 꿈꾸는 사람. 나는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고 집에 들어가 쓰러져 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토요일 밤이기에 포장마차를 갔다. 맥주를 시키고, 소라를 시키고, 국수를 시켰다. 처음엔 나는 맥주만 한 잔하려고 했는데, 소라를 보니 소라가 먹고 싶어졌고, 국수를 보니 국수가 먹고 싶어 졌다. 그리고 그 날 우울하다는 말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맥주를 들이키면서 그 말을 세 번도 더 말했다. 우울해. 우울한 것 같아. 영화를 보고 나니 우울해졌어. 소라도 맛있고, 맥주도 맛있고, 국수도 맛있었지만, 나는 우울했다. 토요일 밤이었지만, 나는 우울했다. 오늘 지금 이 시간도 좀 그렇다. 나는 지금 조금 우울하다. 

        오늘 나는 결혼식 내내 생각했다. 결혼은, 사랑은 과연 행복한 걸까? 이렇게 먹는 비싼 스테이크만 결국 기억나는 게 아닐까? 이렇게 홀짝거리게 되는 비싼 양주만 기억하는 거 아닐까? 막내 삼촌은 내 옆에 앉아서 우리의 20년 후를 말해줬다. 그 날 우리가 우리를 만나 마음껏 놀지 못하고 또 금방 헤어져야만 하는 순간에 얼마나 아쉬워할지, 울지 못해서 웃는 심정을 너희가 직접 느껴보라며 우리를 꼭 안아줬다. 나는 오늘 역시 가족이 최고구나, 생각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얄팍한 사랑이 아니라, 깊게 패인 상처들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우리, 라고 추억하는 가족이 된다는 것. 어제는 죽을 것 같다가도 오늘은 살 것 같은 가족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연인이 결혼을 하면 가족이 된다.

       나는 <사과>는 '연애'보다는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오늘 지금 이 시간에 하고 있다. 그러고 있다. 아, 그리고 이건 전혀 다른 얘긴데, 이번 주말 내내 나는 조제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확히 이 문장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지고' 아,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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