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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마트 피플 - 따듯한 겨울 풍경들
    극장에가다 2008. 8. 23. 16:49


       동생의 졸업식 날.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사진을 찍었다. 학사모와 가운을 뒤집어쓰고 학교 구석구석을 찾아 다녔다. 여름의 졸업식 풍경은 무척 한산하더라. 가운 입고 사진 찍는 졸업생은 동생을 제외하고 딱 두 명 더 봤다. 길고 높은 계단을 타고 내려와 너무나 배가 고파 버스를 타고 나가 베니건스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계단 아래 제일 첫 번째로 보이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쟁반짜장과 깐풍육을 시키고 TV에서 해주는 올림픽 태권도 경기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나와 한 때 내가 갈망했던 KFC의 커다란 치킨통을 닮은 팝콘 대자를 들고 <스마트 피플>를 보러갔다. 
     
       내가 아는 누구는 제목이 '스마트 피플'이라니까 내 얘기잖아, 말했다. (-_-) 이건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리는 스마트하지만 마음은 스마트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 속에 뛰어들면서 스마트해지는 것 같은 기미를 보이며 끝나는 영화다. 나는 할리웃에서 매년 비슷하게 만들어내는 말랑말랑한 가족주의 영화를 '고백하자면' 무척 좋아한다. 그런 영화들이 대개 뻔하고, 특별한 구석도 없고, 전형적으로 따뜻함만을 추구하는 걸 알지만 늘 그런 영화에 끌린다. 그래서 꼭 두 번, 세 번 다시 보곤 한다. 그래서 <스마트 피플>도 기대했었는데, 한 70% 정도는 만족한 것 같다. 일단 배우들이 워낙 좋으니까. 내 기준으로는 우리의 캐리 언니, 사라 제시카 파커는 좀 별로이긴 했지만. 원래 레이첼 와이즈가 캐스팅 되었다가 그만뒀다고 하던데, 레이첼 와이즈가 연기했다면 훨씬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어디선가 파커는 못 생겼고, 말(馬)상이라고 올려놨던데. 말상이라는 표현보고 완전 웃었다. 동감! 데니스 퀘이드와  엘렌 페이지 (아, 우리의 주노!), 토마스 헤이든 처치 연기는 훌륭하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하다. 이야기만 좀 탄탄하게 풀어나갔으면 완소영화가 되었을텐데. 

       이 영화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뭔가 부연설명이 나올 듯한데 없다. 그러니까 로렌스(데니스 퀘이드)가 왜 항상 차의 보조석 자리에 앉지 못하고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만 앉는지. 죽은 아내의 옷을 왜 버리지 못하는지. 바네사(엘렌 페이지)는 왜 아빠의 연애를 무턱대고 반대하는지. 왜 자넷(사라 제시카 파커)이 첫 섹스 후 욕실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 그를 바삐 보냈는지. 그리고 한동안 그녀를 고민하게 만든 이유가 뭐였는지. (이 장면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영화는 대놓고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고, 나는 그래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뭔가 히스토리가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영화 중반부가 지나면 그 이유에 대해서 고백하듯 보여줄 것 같은데, 없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외로우니까. 아내를 잃고 엄마를 잃고 자기 방어에만 철저한 고립되고 이기적인 생활에 빠져 살았기 때문에. 가족들까지도 돌볼 힘이 없이 자신의 외로움에만 허덕이며 살아왔기 때문에. 스마트 피플이라기 보다는 론리 피플이랄까. 외로운 아빠와 딸의 세상 입문기랄까. 

        영화 전체에 그리운 '겨울의 풍경'이 잔뜩 흐른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보기만 해도 차가운 바람이 불 것만 같은 대학의 캠퍼스. 겨울의 웅크린 어깨와 숨을 쉬기만 해도 호호- 나오는 하이얀 입김. 두꺼운 스웨터, 따뜻한 자동차의 히터 바람. 두툼한 장갑과 따뜻한 와인. 그걸 이 무더운 여름이 지나는 길목 차가운 극장 한가운데 앉아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곧 겨울이 올거야. 곧 내 입에서 입김이 쏟아져 나올거야. 두꺼운 스웨터로 내 살을 감출 수 있는 계절이 올거야. 따뜻한 오뎅국물을 마시게 될 거야. 아,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겨울의 기운. 영화를 본 다음날, 비가 쏟아지더니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 버렸다. 창문을 열어놓고 자다 쌀쌀한 기운에 두터운 이불을 꺼내 목까지 덮고 잤다. 아, 여름이 간다. 정말로 여름이 간다.  

        덧. 이 영화 음악도 좋다. 영화도 잔잔하고, 음악도 잔잔하다. 나쁜 말이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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