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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 당장 읽어 보세요서재를쌓다 2008. 3. 17. 19:29
차가운 피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들녘(코기토)
챕터의 첫 문단들이 띄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책이 17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17개의 문단들이 문법을 무시한 채 한 칸씩 앞당겨져 있다. 출판사의 오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규칙적이다. 이야기와 이야기는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1 챕터 전에도 이미 이 일들은 시작되고 있었고, 17 챕터 뒤에도 이 일들이 계속 될 거라는.
<차가운 피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재밌었다. 땀이 났다. 무서웠다. 오싹했다. 화가 났다. 따끔거렸다. 슬펐다. 외로웠다. 마지막 장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다.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결국 끝나버린다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놓치지 말라고, 꼭 읽어보라고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곡예사님도 그런 이유로 내게 이 책을 추천해준 거겠지? 곡예사님, 정말 감사드려요.
이 책을 보게 될 어떤 사람들에게 스포일러 따위를 제공해서 책의 재미를 반감시키고 싶지 않다. 그저 책 제목만 알고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찾아내서 첫장부터 차근차근 읽다보면 차가운 피부의 물컹한 무엇인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인줄 알았으나 그들이 아닌 아득한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쓸쓸한 남극의 섬을 거닐다 고독한 등대 안에 갇히게 되는 슬픈 어떤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책 뒤의 추천글에서처럼 정말 이 책에서 '공포, 스릴러, B급 영화'를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을 따라 뛰고 총을 난사하고 괴상한 모습의 괴물들을 마주하면서 헥헥대고 있으면 어느새 가슴이 아파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였구나. 결국 우리였구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B급 공포 스릴러를 닮은 이 이야기가 촉촉한 감성의 바다에 둘러쌓여 있다는 것. 그 바다에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 정말 내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가가 촉촉해져버리는 거다. 그러니까 이 놀라운 차가운 피부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 잊어 버린 것들, 잊고 싶은 것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일러준다.
아, 이렇게 너무 많이 말해버리다니. 그저 당장 읽어 보세요,라고 말하고 말면 좋을 것을. 책을 읽고 작가 인터뷰와 자료들을 찾아봤다. 소설 속 이야기를 닮은 카탈루냐에 사는 인류학자이기도 한 작가가 5월에 서울에 온단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카탈루냐어로 그가 낭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낭독을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몇 페이지의 어떤 부분인지 왠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