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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죄 - 누구를 위한 속죄인가
    서재를쌓다 2008. 3. 11. 13:58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문학동네


       영화가 개봉한 뒤에 붙여진 띠지일 거다. 영화를 보고 급히 주문한 <속죄>의 띠지에는 <어톤먼트>의 포스터가 새겨져 있었다. 보통 책을 읽는 데 걸리적거려서 띠지는 책꽂이로 사용하거나 그냥 버려 버린다. <속죄>의 띠지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유명한 소설가와 어느 신문사의 극찬 문구와 함께 있었던 한 독자의 문구. '통곡하듯 울렸던 10월의 어느 가을 아침 9시', '문자 그대로 걸핏하면 울었다'. 이 문장들 그대로 <속죄>를 읽어 내려가고 싶었다. 책 표지에는 얼룩진 컵받침같은 무늬가 나뭇잎 사이로 새겨져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후회했다. 영화를 먼저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영화를 상당히 '좋게' 먼저 봐버린 내 머릿속에는 이미 등장인물의 체형과 얼굴, 옷들까지도 생생하게 그려진 채 나란히 서 있었다. 어린 브라오니의 얼굴의 점, 그 꾹 다문 입술. 착한 스무살 즈음의 브라오니, 그녀의 망설임 가득했던 어깨의 곡선. 세실리아의 등뼈가 고스란히 보이는 아름다운 녹색 드레스, 담배를 물고 있던 포즈. 로비의 수염, 분노에 가득찬 그의 팔뚝. 내 머릿 속에 배우들 모습을 그대로 한 등장인물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자신의 배역명이 호명되면 언제라도 벌떡 일어나 연기를 했다. 이미 내 눈 앞엔 <속죄>의 글귀가 아니라 <어톤먼트>의 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영화도 좋았고, 소설도 좋았다. 하지만 글을 먼저 읽었다면 그것을 고스란히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재현한 영상들에 감동하며 볼 수 있었으리라. 그래, 내가 생각한 장면들이 바로 이런 거였어, 라며. 


       영화를 먼저 봐 버린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샌 뒤 '통곡하듯' 봄날의 아침을 맞이할 수 없었다. '걸핏하면' 울 수조차 없었다. 그저 마음이 스물스물 아파왔을 뿐. <어톤먼트>는 <속죄>를 멋지게 재현해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좋았다면 소설을 굳이 볼 필요가 없고, 소설을 보고 좋았다면 영화를 굳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아니면 꽤 긴 시간을 두고 보는 방법이 좋겠다. 영화와 소설의 결말은 다르다. 속죄의 마음으로 마지막 소설을 펴낸 브라오니의 기본 뼈대는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속죄>의 결말을 지나 <어톤먼트>의 결말에 도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책에서는 영화에서처럼 출간 후 인터뷰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일을 맞은 브라오니가 예전의 자신의 저택이였지만 지금은 호텔이 되어버린 추억의 장소에서 친지들과 파티를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예전의 그 서재에서 브라오니는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다. 소설의 처음에 무산된 연극을 아이들이 그녀 앞에서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즉흥적인 성격을 가진 아라벨라라는 아가씨의 이야기'라고 시작하는 바로 그 연극 말이다. '사랑하는 맏딸이 사랑에 빠져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다'는 그 연극. 그래. 이 부분에서 분명 내 마음이 스물스물 아파왔다. 


       어떤 기억은 오래 기억되어 무언가를 버티게 만들어 주고, 어떤 기억은 오래 기억되어 누군가를 파멸시킨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하루도 안 되는, 한 나절도 안 되는, 한 시간도 안 되는 아주 짧은 기억. 브라오니는 자신이 진술을 한 그 짧은 순간 때문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반면 세실리아와 로비는 서재에서의 아주 짧은 순간들을 기억하며 어려운 시기들을 버텨낸다. 그리고 결국 브라오니는 그 짧은 기억들 때문에, 혹은 그 짧은 기억들을 모아 <속죄>라는 긴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브라오니의 한 권의 속죄이다. 어떤 기억은 실제로 일어났고, 어떤 기억은 그녀가 속죄하기 위해서 만들어 냈다. 어떤 기억은 전쟁박물관의 자료들을 찾아 기록했고, 어떤 기억들은 로비의 동료에게서 받은 편지로 창조해냈다. 책을 읽고 난 후, 처음 든 생각은 정말 그녀가 평생을 '속죄'했는가였다. 결국 한 권의 책으로, 실명이 등장하는 한 권의 책 만으로, 자원한 간호일로,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달아나버린 전쟁터의 병사들을 돌보는 일을 꾸역꾸역 참는 것만으로 속죄하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결국 속죄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였다. 내가 나 자신에게서 용서받기 위해서, 내 죄를 내가 용서하기 위한 것이였다. 아니, 꼭 그녀만의 책임인가? 묵인하고 눈 감아버린 다른 사람들은?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고, 누가 누구에게 속죄해야 할까. 이것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인가, 브라오니의 소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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