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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옆 집 아저씨 이사가는 날
    모퉁이다방 2007. 10. 21. 13:54
       옆 집 아저씨는 약간 대머리다. 옆 집 아저씨는 큰 키에 마른 체형이다. 옆 집 아저씨는 언제나 츄리닝 차림이다. 옆 집 아저씨는 셈을 잘한다. 옆 집 아저씨는 자주 동네를 느린 걸음으로 산책한다. 옆 집 아저씨 집 앞에서는 언제나 자주 타지 않는 듯한 탐나는 자전거가 있다.

       내가 옆 집 아저씨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아저씨를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건, 한 달에 딱 한 번. 아저씨는 그 달 초에 전기요금 청구서와 본인의 전기세 분량의 돈을 들고 우리집 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그러면 아저씨는 항상 옆 집이예요, 라고 하신다. 그리고 매달 17일마다 계량기를 체크해서 적어둔 네자리 숫자를 이용해서 뺄셈을 한 뒤 이번 달은 이만큼 나왔어요, 하시면서 돈과 청구서를 건네주신다.

       우리는 아저씨가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 궁금했다. 거의 대부분 집에 계셔서 극성스러운 택배 아저씨가 우리집 문을 계속해서 쿵쿵거리면 슬그머니 나와서 택배를 맡아주시고, 혼자 사시는 게 분명한데 낮에 가끔 여러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우리는 아저씨 가족들이 온건가, 혹시 이혼을 하신건가, 기러기 아빠인가, 여러 추측을 하곤 했다.

        우리집에서 아저씨와 가장 길게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은 둘째 동생이다. 어느 날 낮에 동생은 집에 혼자 있다가 뭔가를 사러 나갔다 돌아왔는데 우리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동생은 슬그머니 그 틈에 끼여서 구경을 했는데 알고보니 우리 집 건물에 조그마한 불이 났던 거였다. 그 겨울 최고로 추운 밤이 지났고 우리 집 수도가 얼었다. 그래서 주인아저씨가 내려와서 이렇게 저렇게 손 봐줬는데 그게 잘못된 거였다. (늘 주인집은 우리집에 잔고장이 나면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큰 공사까지 가게 만든다는) 아무튼 사건은 해결됐고, 동생이 그 틈에 가만히 서 있는데 옆을 보니까 옆 집 아저씨가 어김없이 츄리닝 복장으로 서 있었다. 동생은 괜히 어색한 대화가 오고 갈까봐 슬금슬금 옆으로 피했는데 아저씨가 동생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셨단다. 그때 우리집은 아저씨 집와 우리집이 같은 층에 있어서 전기세를 함께 내고 있었는데 그게 한 집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누진세로 엄청난 전기요금을 내고 있었다. 아저씨가 그 문제를 동사무소에서 해결하고 왔다면서 다음 달부터 두 집으로 계산되어서 덜 나올 거라고 당당하고 늠름한 목소리로 전하시더란다. 동생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아저씨와 헤어져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튼 그 뒤로 가끔 아저씨를 집 앞에서 전기세 문제로 마주치면서 우리는 늘 이 아저씨가 왜 작은 집에 혼자 사는지, 무슨 일을 하시길래 늘 집에 계시는지 궁금했다. 결국 궁금증은 해결되지 못했고, 어제 아저씨는 우리에게 마지막 전기요금을 넘겨주셨다. 셈을 잘하는 아저씨는 어제분까지 정확하게 네자리 숫자를 빼서 만오천원을 넘겨주시면서 잘 있으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또 궁금해졌다. 아저씨는 어디로 가는 걸까.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되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결혼을 못한 총각이실까.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시는 걸까.

       오늘 아침, 문 밖으로 쿵쾅쿵쾅 이사짐 나르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정다운 이웃이 되지 못했던 우리는 문을 열어 잘 가시라는 인사정도도 하지 못하고 창 밖으로 아저씨의 짐이 실리는 모습만 훔쳐봤다. 깔끔한 작은 장농이 실리고, 나무색의 책상도 실리고, 텔레비전도 실리고, 이불보따리도 실리고. 늘 우리를 방문하셨던 아저씨라 그 집이 얼마 만큼의 크기인지 모르고 그저 주인집에서 옆 집은 방이 하나라는 말만 듣고, 밖에서보면 창이 하나뿐인 걸 보고 작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저씨의 짐은 제법 많았다. 트럭 하나에 아저씨의 짐이 빼꼼하게 들어찼다. 옆에는 아저씨의 어머니로 보이시는 분이 계셨고. 창 밖으로 훔쳐본 아저씨의 표정이 밝았다. 전기세를 넘겨줄 때도, 동네 어귀를 산책할 때도 볼 수 없었던 웃음이 넘치는 표정. 나는 확신했다. 아저씨는 더 좋은 곳으로 가시는 구나. 먼지를 폴폴 날리시며 떠나는 1년동안 궁금했던 아저씨의 집 안 짐들을 뒤로 하며 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안녕, 이라고 왠지 부럽다,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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