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르츠

from 극장에가다 2018.12.07 14:16



  제주에서 귤을 보내줬다. 유기농 귤이라 빨리 먹어야 한다는 메모가 있었다. 며칠 두었더니 상자 아래에 터지기 시작하는 귤들이 있어 어쩌지 하다 귤잼을 만들었다.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히라마쓰 요코의 조언대로 밤에 잼을 만들기 시작했다. 터지고 무른 귤들을 골라내 껍질을 벗겨내고 한 알 한 알 떼어냈다. 인터넷의 레시피대로 믹서에 돌리지 않고 나무주걱으로 꾹꾹 눌러 과육이 나오게 터트렸다. 그렇게 끓이고, 설탕과 꿀을 넣고, 가끔 주걱을 휘저으면서 생애 첫 귤잼을 완성했다. 집안 가득 달달한 냄새가 가득했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먹기 좋게 식어있었다. 사놓은 식빵이 없어 요거트에 넣어 먹었다. 레시피는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를 그대로 따랐다. "중요한 것은 왁스를 칠하지 않은 제철 과일을 사용하는 것. 산에 강한 냄비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보글보글 약한 불로 지나치게 오래 졸이지 말고, 설탕을 넣고 껍질과 과즙, 과일을 함께 섞으며 걸쭉하게 졸이는 것. 그 정도."


   어제 본 영화 <인생 후르츠>는 무척 좋았다. 90세의 할아버지, 87세의 할머니, 둘이 합쳐 177살.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의 이야기라 너무 슬프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왠걸 경쾌하고 밝았다. 두 분은 제법 큰 마당이 있는 곳에 15평짜리 원룸 형태의 나무집을 직접 짓고 사시는데, 집은 건축가인 할아버지의 솜씨이다. 커다란 나무식탁이 있고, 길다란 나무막대를 이용해 열수 있는 지붕의 나무창문이 있다. 이 창문이 정말 근사하다. 나무식탁에는 할머니가 직접 수를 놓은 것 같은 하얀 식탁보가 깔려 있다. 두 분은 식사를 마치고 이 식탁에 가만히 앉아 마당을 내다본다. 마당에는 두 분이 직접 가꾸는 밭과 과일나무들이 있다. 어느 날 간식으로 할머니가 요거트에 과일을 얹어서 내어왔는데, 할아버지가 스푼을 집더니 나는 이거 싫어요, 하신다. 그러자 할머니가 주방에서 나무스푼을 가져와 나무가 아니면 싫어해요, 라고 하신다. 그 장면을 보고, 좋아할 수 밖에 없는 할아버지다, 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나이가 많이 들면서 얼굴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잘 생겼구나, 생각도 하신다고. 그런데 정말 그랬다.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이 간간이 나왔는데, 정말 지금 백발의 할아버지 얼굴이 더 좋았다. 표정도 미소도 노년이 되면서 무척 편안해졌다. 할머니도 그렇고. 할아버지는 일본주택공단이라는 곳에서 일했는데, 늘 자연과 함께하는 주택 설계를 꿈꿨단다. 산을 살리고, 나무가 무성하고, 바람이 통하는 집. 그런데 그러한 처음의 계획들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실현이 되지 않자 직접 삼나무 집을 짓고, 나무들을 밀어버린 곳에 다시 나무를 심기 시작한다. 과거 직장동료의 표현에 의하면 슬로우 라이프가 시작된 것. 그리고 할아버지는 기록광이다. 두 사람의 텃밭에는 무엇을 심었는지 적어놓은 노란 팻말이 있는데, 작물이름 밑에 아주 귀여운 문구들을 덧붙여 놓았다. '작은 새들의 옹달샘'이라고 적은 수반 팻말 밑에는 '와서 마셔요', 죽순 팻말 밑에는 '죽순아 안녕', 작약의 팻말에는 '미인이려나', 능소화 팻말에는 '붉은 꽃의 터널을 지나 보세요'. 그리고 매일 엽서를 쓰시고, 우체국에 가서 부치신다. 그림도 귀엽게 잘 그리시고. 직접 만나지 않고 편지로만 이어진 인연들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영화의 마지막, 할아버지가 제초작업을 하고 돌아와 잠이 드셨는데 깨어나지 못하셨다. 그렇게 한번도 자신의 마지막을 상상해본 적 없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이 할아버지스럽다고 생각했다. 건강하게 자연과 함께 하시다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장례식 뒤 할머니를 찾아간 제작진에게 이런저런 음식을 대접하고,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65년이나 함께 했으니까요. 둘이 있다가 혼자 지내는 삶이 쓸쓸하기 보다 어떤 마음이 든다고 하셨는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네. 덧없다와 비슷한 말이었던 것 같다. 이 말이 짠하고 좋았는데. 할아버지는 편지지에 할머니의 모습을 귀엽게 그려놓고서 '내 최고의 여자친구'라고 적었다. 그런 두 분의 이야기다. 


   서점에 갔다가 히라마쓰 요코의 새 책을 봤다. 제목은 <손때 묻은 나의 부엌>. 요즘 나무숟가락과 수저받침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젓가락받침에 대한 이런 글이 있었다. "사실 젓가락받침은 부엌에서 씻을 때가 가장 즐겁다. 손바닥으로 굴리고 문지르면서. 작고 아기자기한 물건을 보면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 옳지, 옳지 하며 쓰다듬고 싶어진다. 그중에서도 산호 젓가락받침은 귀까지 즐겁게 해 준다. 가벼운 소리가 서로 부딪히면서 남쪽 섬의 파도소리가 귓가에 울리기 때문이다. 이 젓가락 받침은 태국 푸껫 섬 해안에서 주운 산호다. (...) 이른 봄에는 매화나무 가지, 4월에는 벚꽃나무 가지로 젓가락받침을 만들곤 했다. (...) 젓가락을 쉬게 할 수 있다면, 뭐든 젓가락받침이 될 수 있다. 하다못해 갓길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나 나뭇가지도, 검푸른 대해에서 밀려온 산호라고 해도 말이다." 영화를 보고, 잼을 졸이고, 새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만치 사소한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해질 수 있다. 사소한 행복을 자주 발견하자. 어제는 남대문 시장에서 나무 숟가락과 젓가락 하나씩을 사왔다. 올해가 가기 전에 우드카빙 수업을 듣고 싶다. 내 숟가락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1. pkw 2018.12.07 19:28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공감가는 이야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