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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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 보이스 앤 로보 - 우주에서 나 자신뿐이니까티비를보다 2008. 3. 28. 03:15
고백하건데 나는 10화의 어떤 부분을 술에 취해 열 번 이상 되돌려봤다. 한 때는 꿈과 희망만 가득했던 만화가와 그의 부인이 있었다. 만화가는 성공했고 돈도 많아졌지만 점쟁이의 말을 맹신해 자신은 곧 죽을 것이고 다음 생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걱정한다. 그의 부인은 꿈과 희망과 사랑이 가득했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정전이 찾아온 순간, 도시는 어둠에 휩싸인다. 성공한 만화가도 과거가 그리운 부인도. '우린 아직 어두운 길을 둘이서 걷고 있어'라고 만화가가 말하는 순간,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길 위의 사람 앞에 마법처럼 스르르 불을 밝힌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 성공한 만화가는 탄성을 낮게 내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비친 네모난 창문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꿈과 희망과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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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 이 책의 열 가지 장점서재를쌓다 2008. 3. 25. 18:11
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문학동네 작년 겨울, 문학동네 가을호에 실렸다는 김애란 작가가 쓴 편혜영 작가에 관한 '작가의 초상 - 그녀에게 휘파람'의 일부분을 twinpix님 블로그에서 읽었다. 첫 책이 나온 편혜영 작가가 너댓번 만난 김애란 작가와 마주 앉아 이 책의 장점에 대해 열 가지씩 돌아가면서 말해보자는 글귀에서 피식 웃어버렸다. 이 글을 쓴 김애란 작가도, 그 말을 한 편혜영 작가도 귀여웠다. 두 사람이 돌아가며 책의 장점 하나씩을 이야기할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편혜영 작가의 책을 읽어야지, 생각했다. 며칠 전 도서관에 들러서 한국소설 코너를 기웃거리는데 그 곳에 내가 언젠가 찜해두었던 소설들이 서로 멀지 않은 자리에 꽂혀 있었다. 천명관의 , 한유주의 ,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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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가 살던 곳 - 봄을 만나는 길티비를보다 2008. 3. 24. 12:46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따닥따닥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커피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우산을 펴들고 집 앞에서 거품이 소복히 얹혀진 커피를 사고 들어오는 길에 갑자기 '은어가 살던 곳'이 생각이 납니다. 당장 집에 가서 그 단막극을 다시 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따딱따딱.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엠피쓰리 속의 음악보다 더 훌륭합니다. 아, 요즘 루시드 폴의 '삼청동'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 컴퓨터를 켜니 샛노란 봄 빛깔의 현미씨가 저를 맞아줍니다. 나풀거리는 롱 스커트를 입고 샛노란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그녀는 하동 터미널에서 내립니다. 높은 샌들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어째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다구요. 결국 그 샌들 덕분에 기가 막히게 눈부신 여행을 했지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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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 - 네덜란드에서 불어온 따스한 한 줄기의 바람극장에가다 2008. 3. 23. 11:40
10년 전쯤에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이야기. 어쩌면 그 곳에서 이 유토피아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동성간의 결혼이 인정되는 풍차가 돌아가는 곳. 마약과 매춘이 합법적인 튤립이 만연한 곳. 언젠가 이 영화에 대한 글을 봤다. 당장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글이였다. 마침 저렴한 가격에 DVD가 판매중이였고, 바로 주문했다. 처럼 언젠가 보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책장 안에 고이 묻혀둔 이야기. 바다를 건너 온 풍차의 바람을 따스했다. 영화 속에 풍차는 배경으로도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 따스하고 서늘한 바람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건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안토니아에 관한 이야기다. 첫 장면에서 안토니아는 자신의 죽음과 마주한다. 그녀는 안다.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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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억들서재를쌓다 2008. 3. 21. 18:21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Media2.0 그런 식의 이야기다. 대학교 세미나 시간. 일주일에 한 권씩 읽어가야만 하는 과제가 벅찼다. 과제로 읽어야 하는 책들은 늘 어렵고 따분했다. 학기 내내 거의 절반 이상의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았을 거다. 그 날도 세미나 시간에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말이라도 한 마디씩 하라고 하셨다. 무슨 책이였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다 읽진 못했지만 읽은 부분까지의 느낌은 커다란 도서관 안에 나 혼자 덩그라니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교수님은 책들처럼 꽉 찬 느낌이였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그 반대라고 했다. 그 많은 책들 속에서 나 혼자만 덩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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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야기 - 친구에게극장에가다 2008. 3. 19. 16:33
이렇게 봄이 찾아와 주셨으니 를 봐줘야 한다. 작년 인터넷 서점에서 DVD를 발견하고는 당장 주문했다. 그리고 책장 안에 고이 꽂아두고는 봄이 오기만 기다렸다. 대학교 1학년 즈음이였던 것 같다. 집에 내려가 있던 여름방학, 우리집은 우즈키를 닮은 내 친구의 동네로 옮겨져 있었다. 친구와 나는 여름 밤에 자주 만났다. 버스를 타지 않아도 금방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우리가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나는 자주 복도 창 밖에 고개를 내밀고 수다를 떨었다. 저녁시간에 훌쩍 여럿이서 야자를 빼먹고 학교에서 가까운 노래방에 놀러 가곤 했다. 노래방 언니는 늘 요구르트 하나씩을 줬었다. 의자 위에서 몸을 떨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 학교로 걸어오는 길에 방금 부른 노래를 흥얼거리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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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 당장 읽어 보세요서재를쌓다 2008. 3. 17. 19:29
차가운 피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들녘(코기토) 챕터의 첫 문단들이 띄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책이 17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17개의 문단들이 문법을 무시한 채 한 칸씩 앞당겨져 있다. 출판사의 오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규칙적이다. 이야기와 이야기는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1 챕터 전에도 이미 이 일들은 시작되고 있었고, 17 챕터 뒤에도 이 일들이 계속 될 거라는. 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재밌었다. 땀이 났다. 무서웠다. 오싹했다. 화가 났다. 따끔거렸다. 슬펐다. 외로웠다. 마지막 장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다.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결국 끝나버린다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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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 정말 돈 주고 사봐야 하는 책서재를쌓다 2008. 3. 14. 16:28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문학동네 하룻밤만에 다 읽은 책이다. 세계 곳곳에서 다들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쓰고 있으니... 언젠가 비행기에서 본 발리우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소설이다. 이런 소설은 새해맞이 기념으로 다들 그냥 읽어주시길. 김연수 작가님이 이런 식으로 추천한 책이다.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으랴. 제목도 괴상한 는 이렇게 내게 다가왔다. 대학교 2학년즈음이였나보다. 친구랑 대학로를 걷다 영화를 보자 했다. 그때 우리가 발견한 극장이 하이퍼텍 나다였다. 발리우드 영화가 상영 중이였다. 좀 특이한 영화를 보고 싶었던 우리는 그 작은 극장에 처음 발을 내밀었다. 예쁜 인도 여자 주인공이 나왔다. 대사를 하다 갑자기 허리를 비틀며 춤을 추어댔고 경쾌한 리듬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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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 누구를 위한 속죄인가서재를쌓다 2008. 3. 11. 13:58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문학동네 영화가 개봉한 뒤에 붙여진 띠지일 거다. 영화를 보고 급히 주문한 의 띠지에는 의 포스터가 새겨져 있었다. 보통 책을 읽는 데 걸리적거려서 띠지는 책꽂이로 사용하거나 그냥 버려 버린다. 의 띠지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유명한 소설가와 어느 신문사의 극찬 문구와 함께 있었던 한 독자의 문구. '통곡하듯 울렸던 10월의 어느 가을 아침 9시', '문자 그대로 걸핏하면 울었다'. 이 문장들 그대로 를 읽어 내려가고 싶었다. 책 표지에는 얼룩진 컵받침같은 무늬가 나뭇잎 사이로 새겨져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후회했다. 영화를 먼저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영화를 상당히 '좋게' 먼저 봐버린 내 머릿속에는 이미 등장인물의 체형과 얼굴, 옷들까지도 생생하게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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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블루베리나이츠 -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는 법극장에가다 2008. 3. 10. 20:59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라서 드문드문 지워진 그 해 여름. 그 해의 기억이 언젠가 차츰 지워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래. 세월이 약이라고 어떤 기억은 오래 남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어떤 기억은 잊혀져서 나를 절망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해 여름, 내리는 비만큼 많은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들었던 그 때. 는 그 시절의 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진행 중인 이별을 말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과해야 하는 법이다. 흘리는 눈물도, 마시는 술도, 다시 시작하자고 입 안 가득 맴도는 말도, 흐르는 음악조차도. 그 해 여름을 아주 오래 전 지나온 나는 를 중반쯤 보고선 지겹다고 생각했다. 늘 똑같은 사랑, 늘 똑같은 이별, 늘 똑같은 아픔. 왜 나는 그 때 쿨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