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봉천군 시중호의 모습이 보이면서 <자라의 생존법칙>은 시작됩니다. 우선 이 곳이 남한이 아니라 북한의 땅이며, 촬영은 조선기록 과학영화촬영소팀 촬영하고 MBC가 구성, 편집을 담당한 '남북공동제작 자연다큐멘터리'라고 말해줍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의 땅을 디디고, 단군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던 홍익인간 정신으로 나라를 개국하던 날, 남한의 티비에서는 북한에서 생존하고 있는 자라의 모습이 방영됩니다. 이 다큐는 지난 2월에 방영되었던 거라고 해요. 여러 의미들을 기념하고 내포한 채 재방영되는 <자라의 생존법칙>을 봅니다.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기보다는 <주주클럽>을 더 챙겨보는 저로써는 자연다큐는 실로 오랜만입니다. 북한 땅을 담은 자연다큐는 처음이구요. <자라의 생존법칙>은 자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오래 이 땅을 밟아왔는지, 그리고 그 세월을 견뎌오는 동안 살아남기 힘든 생태계에서 생존 노하우를 쌓아오며 얼마나 힘겹게 지내왔는지에 대해서요. 물론 자라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이 다큐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어요. 일단 북한의 시중호의 모습이 있습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의 풍경, 왠지 티비를 보고 있는 방 안에까지 풍겨져 나오는 것만 같았던 신선한 공기, 맑은 물. 시중호는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해요. 그리고 자라 외에도 그 땅의 많은 생명체가 등장합니다. 자라와 한판 싸움을 벌였던 뱀이며 두꺼비며 참게, 자라를 무척이나 신기해하다 호되게 당했던 귀여운 소나 강아지까지요. 잠깐씩이지만 이 수중호에 사는 푸른바다거북같이 귀이한 생물체들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이 다큐를 촬영했던 조선기록 과학영화촬영소의 모습이예요. 다큐를 보는 내내 이렇게 미세한 클로즈업을 어떻게 잡아내는지 궁금했었는데 때마침 그들이 등장하더라구요. 보기에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셨고, 촬영하는 모습이 잠깐 지나가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라에 대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잡혔는데, 이 다큐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이였습니다. 이런 대화들이 오고 갔거든요. 조금만 더 힘내서 촬영하자. 오줌 마려운 것도 담배 피고 싶은 것도 조금씩 참자, 그러자 어떤 분이 그런데 식사시간 건너뛰자는 말은 제일 섭섭하다고 말합니다.

   두리뭉실하게 알고만 있었던 자라에 대해서 세세하게 학습할 수 있는 좋은 다큐였습니다. 자라코가 수중에서 숨 쉬기 좋게 길게 뻗은 돼지코라는 거, 순해보이는 자라지만 쇠젓가락도 부러뜨릴 이와 날카로운 발톱을 지녀 왠만한 싸움에서 지지 않는 다는 거 (다큐에서 뱀, 두꺼비, 참게와 생존을 위해 싸움을 하는데 자라가 다 이겼습니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신체 구조를 지니고 있고 밤눈이 밝고 밤에 식욕이 왕성해 야간사냥을 자주 한다는 거 (왠지 스파이와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산란기에 알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컷끼리 피가 터지는 자리싸움을 벌인다는 거 (동물세계에서는 싸울 때는 죽을 힘을 다해 힘껏 싸우고, 패배했을 때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깨끗하게 떠난다고 하더군요.) 산란기에 수컷은 5마리 정도의 암컷과 짝짓기를 한다는 거, 자라는 자신의 알을 품거나 도와주지 않고 다만 멀리서 알자리를 지켜보기만 한다는 거, 그래서 새끼자라는 혼자서 알을 깨고 태어나 어미도 없이 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생대때부터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온 자라. 태초의 자라도 다큐 속의 부화를 막 시작한 새끼자라들처럼 혼자였겠지요. 그렇게 물을 향해 살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갔고 처음으로 물갈퀴가 있는 발을 휘저으며 헤엄치기 시작했겠지요. 이따금씩 물밖의 공기를 돼지코를 내밀어 들이 마시면서요. 자라는 공격을 먼저 잘 하지 않는다고 해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공격을 한대요. 거의 대부분은 등껍질 안으로 목을 집어 넣고 죽은척하면서 귀찮은 상황이 끝나길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 위에서는 1분에 4M를 갈 정도로 느리지만 물 속에 들어가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헤엄친다고 해요. 엉뚱할 수도 있겠지만 약하게만 알고 있었지만 실은 누구보다 강한 자라를 담은 이 다큐를 보면서 그 땅과 그 땅을 디디고 있는 우리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삶이 자라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악한 마음으로 먼저 공격하지는 않으되 누군가 부당한 공격을 해 오면 절대 지지 않는, 그것이 어떤 강한 상대일지라도요. 때로는 멀리서 소중한 것을 지켜주고 나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줄 알고 강하고 용맹하게 이 땅에 오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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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 아나토미 4시즌이 시작됐다. 짜잔. 이번 시즌은 한 주 한 주 챙겨서 봐야겠다. 기다리는 맛도 있으니. 1화의 타이틀이 <A Change is Gonna Come>인 것 처럼 우리의 인턴들이 레지던트로 돌아왔다. 조지만 빼고.

   4시즌 1화는 레지던트가 된 주인공들과 다시 인턴이 된 조지의 첫 날에 관한 이야기다. 인턴들을 거드리며 1시즌의 나치 미란다의 흉내를 내는 우리의 레지던트들은 보기에 영 어색하기만 하고, 3시즌의 복잡하고 처절했던 결말이 4시즌으로 이어지면서 그레이스 식구들의 마음도 얼굴도 모두 어둡기만 하다.

   4시즌 시작의 포인트는 모두가 마음이 아프고 힘든 상태라는 것.

   3시즌에서 엄마와 새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아빠도 잃은 셈인 메러디스는 데릭에게 서로를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크리스티나와 버크는 결혼식에서 무너졌다. 늘 준비가 되지 않았던 크리스나의 마음은 결혼식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확신이 섰고, 늘 준비가 되어 있었던 버크는 바로 그 순간 더이상 둘 사이가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지가 그저 친구였던 '너를 사랑한다'는 걸 고백한 때의 조지는 켈리의 남편이었다. 여자의 육감이란 무서운 지라 켈리는 이를 눈치채고 불안하고 화가 나고, 이지에게 더 이상 키스를 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조지는 이지를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 눈빛이 딱 그렇잖아.

   알렉스는 이지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환자와 사랑에 빠졌고, 이지가 예전에 못 그랬던 것처럼 마음은 아프지만 그녀를 보내줬다.

   리차드는 여전히 아내와의 문제로 삐끄덕거리고, 에디슨과 버크는 4시즌에서 사라져버렸다. 미란다는 왜 자신이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프레지던트를 켈리에게 뺐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 우리의 바람둥이 마크 선생은 이제 같이 잘 여자 말고 같이 이야기할 친구가 필요하다걸 느끼는 순간 외로워진다.

   그리고 새 인턴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사람. 렉시 그레이. 메러디스의 의붓동생이 인턴으로 들어왔다. 렉시는 메러디스가 그랬던 것처럼 데릭과 바에서 만났고 조지를 신생아병동에서 위로해줬다. 렉시의 문제는 바로 언니 메러디스. 여전히 문제에 직면하면 피해버리고 마는 메러디스때문이다.

   복잡하구나. 어찌됐음 아프고 시린 마음으로 시작하는 4시즌의 그레이스 병동에는 변화가 찾아왔고, 첫날을 보내는 동안 이런저런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했다. 아니, 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고 해야하나? 확실히 마지막 조지의 멘트는 그들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이 복잡하고 문제 많은 관계들이 또 어떻게 꼬여갈지 보는 재미가 있는 그레이 아나토미니깐.

   아무튼 반가워, 4시즌. 좋은 이야기들로 잘 부탁하구. 섹시한 버크와 에디슨이 빠져서 아쉽긴 하지만. 귀엽고 예쁜 렉시가 들어왔으니. 에디슨은 아나토미 스핀오프 드라마로 빠졌단다. <Private Practice>. 3시즌에 잠깐 2화로 나온 거 나는 그저그랬는데. 아무튼. 인턴들에게 약하게만 보였던 이지가 어이없게 말려든 사건을 해결한 후 인턴들에게 연설을 하며 돌아설 때 정말 멋졌다. 왜 자꾸 내가 뿌듯해지는지. 멋진 레지던트 언니, 오빠들의 활약을 기대하며 이만 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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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회말 2아웃 첫방송때 마음에 척척 달라붙는 대사들에 이끌려 닥본사의 애청자가 되겠노라고 다짐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져버렸다. 아직 스물두살인 막내동생은 이 드라마에 홀짝 빠져 꼭 닥본사를 하며, 중요한 약속 때문에 빠뜨린 날은 그 밤이 채 가기도 전에 다시보기를 해서 챙겨본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물었을 때 귀찮은듯이 대답을 안 하더니 저번회부터 정주가 나오지 않는다며 갑자기 재미가 없어졌다는 걸 보니 이태성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난희가 좋았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서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인 난희, 직장생활은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고, 서른에 가까워온 생의 허무함을 서른즈음에로 노래하는, 포장마차에서 절망과 희망을 섞은 폭탄주를 들이키며 푸념할 수 있는 그녀. 어떤 때는 나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 같지 않아서 좋았던 난희.

   그런데 첫방송 이후 몇 편을 닥본사하다 보니 난희가 푸념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꿈이 있다. 비록 계속 실패하고 있긴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작가라는 목표가 젊은 나이를 꼭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먹을수록 글은 더욱 깊어질테니 언젠가 이렇게 노력하다보면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때까지 최소한의 아니, 풍요롭지 않아도 평범한 경제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 말로는 월급도 못 받는다 하지만 월급은 꼬박꼬박 밀려서라도 나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번주에 보니깐 매출이 올랐다고 사장이 수산시장에서 회까지 쏘시더라. 그리고 연하의 팔팔하고 잘생긴 남자친구. 저번주에 헤어진 듯 했지만, 아무튼 연하의 풋풋하고 순수해서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로 인해 서른에도 스무살의 열정적인 연애를 맛보지 않았나. 마지막으로 제일 부러운 30년지기 친구 형태. 똥모양이라고 놀려댈 수 있는 남자'친구',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나는 친구이며 언제든 술잔을 함께 마주쳐주는 친구, 지나간 유행가를 길거리에서 함께 부르면서 쪽팔려하지 않을 수 있는 친구, 어떤 때는 남자친구이면서 어떤 때는 여자친구이기도 한 언제든 내게서 도망가지 않을 것만은 분명한 친구, 게다가 잘 생겼고 잘 나간다.

   됐다. 이 정도면 난희는 충분히 행복하다. 매일밤 포장마차나 맥주를 마시며 푸념할 필요는 없다고! 그럼에도 난희는 푸념한다. 뭐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어린 남자친구와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이런 푸념따위는 그래, 들어줄 만하다. 내가 이 드라마를 조금씩 멀리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난희가 수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희가 아니 수애가 외모에 대해서 푸념을 하는 순간들 때문이다. 수애는 예쁘다. 수애는 갸날플정도로 날씬하다. 그리고 수애는 어리다. 아니다 실수했구나. 지금 검색해보니 수애 80년생이다. 올해 28살, 그렇게 어리지 않구나. 왜 어리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럼 다시. 수애는 무척이나 어려보인다. 그런 수애가 말한다. 자신보다 도저히 더 어려보이는 것 같지는 않은 후배를 보고, "젊은 여자 봤을 때, 고거 참 싱싱하네 하는 거 보면 나 늙은 거 맞죠?" 그리고 어이없게도 또 이렇게 말한다. "고뇬 참 탱탱하네." 등등. 나는 예쁘고 아름답고 탱탱한 수애가 저런 대사를 날릴 때 정말 공감되지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다고, 수애한데. 고뇬 참 탱탱하네.

   그래도 이 드라마, 대사가 너무 좋다. 마치 작가가 직접 경험해 본 것만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서른즈음 마음에 자석처럼 착착 달라붙는 대사들. 그동안 닥본사하지 못한 회들은 대본보기해야겠다. 나는 도저히 수애의 푸념을 듣지 못하겠다. 난희가 아무리 자학을 해도, 수애는 빛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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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온스타일에서 섹스앤시티 더 무비라고. 각 캐릭터별로 편집해서 방송해주더라. 미란다편만 빼고 다 봤는데, 그녀들을 거쳐간 남자들이 쫘악 정리가 되더라. 어제 캐리편을 봤다. 캐리를 거쳐간 남자들 가운데 캐리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고 아프게 한 네 남자들에 대한 구절구절. 빅, 에이든, 버거, 알렉산더.


   사실 캐리의 남자는 에서 시작해서 빅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캐리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 근사한 남자였지. 외모도 훌륭하고, 부자였고, 매너도 좋았지. 헤어진 후에 26살 나타샤와 결혼을 하면서 캐리의 마음을 찢어놓았었지만, 빅의 마음 속에도 캐리는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 다른 남자와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던 캐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긴 했지만 (그래서 캐리가 에이든과 헤어지게 됐었잖아. 이때는 정말 화났었다구!) 두 사람이 천생연분인 건 틀림없었다. 늘 사랑과 우정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두 사람. 6시즌 마지막편에 파리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순간, 짠하고 빅이 나타났을 때는 정말 백마탄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니까. 때로 아빠같이, 때로는 애인같이, 때로는 친구같이. 빅은 키다리 아저씨같은 사람.

   하지만 빅은 캐리를 많이 힘들게 했다. 늘 자기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사귀고 있는 중에도 캐리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잖아. 파리로 오랫동안 출장갈 때도 캐리한테는 상의도 않고, 자기 가족을 소개시켜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결혼을 한다 말하고, 또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이혼하겠다고 너를 잊을 수 없다 말하고. 캐리 집에서 잘 자지 않았던 게 빅이였지? 아마. 아무튼 그럴때마다 빅을 많이 사랑하는 캐리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게 아팠는데. 늘 그렇게 빅에게 사랑이란 이유로 당하기만 하는 캐리가 불쌍해서 빅의 약혼식 날, 캐리가 빅에게서 뒤돌아 나오면서 했던 나레이션은 정말 멋졌다. 뭐였더라? 찾아봐야지.

내가 빅을 길들이지 못했던 거 아니라, 빅이 나를 길들이지 못한 것이다.
길들일 수 없는 여자들도 있다.
그들은 자유롭게 달릴 것이다.
자신들과 미친듯이 달려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그 에피소드에 캐리와 친구들이 말했던 허블의 영화, 로버트 레드포드의 <추억>이라는 영화라네. 한번 찾아서 봐야지.


   섹스앤시티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빅보다는 에이든이 더 좋았다. 빅은 너무 중후한 중년의 느낌이였고 나는 그가 정말 캐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이든은 달랐다. 정말 캐리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결혼해 달라고 조르는 것도, 동거를 시작한 것도 모두 그가 캐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캐리가 내가 응원했던 에이든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나는 캐리가 바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몇 번 반복해서 에이든을 보면서 나는 내 생각을 틀렸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에이든은 빅보다 어렸고, 캐리보다 여렸어. 사랑했지만, 결혼할 수 없게 되자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남자. 이제 나는 캐리가 에이든과 헤어진 건 정말 잘 한 일이였다고 생각해. 그리고 에이든보다 빅이 더 낫다고.
   그래도 에이든은 내게 있어 뭐랄까 이십대의 사랑이랄까. 늘 함께 있고 싶고, 그 사람에게 내가 늘 힘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 사람이 필요한 건 뭐든지 해 주고 싶은 사람. 넌 날 배신했잖아,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아직도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표현하는 사람. 누구나 어릴 때 이런 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이런 사랑이 되기도 하지. 돌아보면 조금은 무모하고 철없었던 행동들때문에 살짝 민망해지는, 하지만 결코 후회는 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에이든이다.
 
   에피소드들을 더 봤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보니까 빠뜨린 것이 있더라. 에이든과의 사랑이야기편이 끝나갈 무렵, 그래도 캐리의 마음을 한동안 커다랗게 차지했던 사람인데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조금 머리카락이 더 자란 에이든이 나왔다. 캐리가 결혼해주지 않자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떠난 에이든은 역시 잠시라도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였어. 늘 누군가를 사귀는 사람이 주위에 있지 않나? 에이든이 그런 사람들인 거 같다. 우연히 캐리와 마주친 에이든의 배에는 아기가 있었다. 에이든의 아기.

   언젠가 그런 모습으로 젊은 날의 사랑을 마주칠 수 있겠지? 그때 나는 캐리의 모습일까? 에이든의 모습일까?  
 

버거.
콜린 파렐을 닮은 버거.
   포스트잇으로 이별을 고한 남자. 캐리가 만난 남자들 가운데 가장 소심하고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남자.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작게 만든 남자였어. 처음에는 정말 캐리에게 정말 잘 맞는 남자였잖아. 말도 잘 통하고, 직업도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길거리에 버려진 카드를 줍는 사람. (이 에피소드에서 캐리가 먹던 맥도날드 빅 쉐이크가 너무나 맛나보여 당장 사먹었는데, 맛이 없더라. 캐리가 먹고있어서 맛있어 보였던 걸까?) 아마 개구리 소리를 켜 놔야 잠이 드는 사람이였지?
    캐리가 잘 나가기 시작하고, 자신의 상황은 힘들어지자 그걸 극복하지 못해 못난 모습 많이 보인 남자. 사실 그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버거는 너무나 소심했다고. 너무나 이기적이였고. 포스트잇 이별은 너무 하잖아. 'I'm sorry. I can't. Don't hate me' 를 붙여놓고 여자를 떠나는 남자는 정말.

    사랑하는 순간도 중요하지만, 이별하는 순간도 중요한건데. 버거가 포스트 잇을 붙이고 이별을 고한 날, 캐리와 친구들이 모여서 밤새 술을 마시고, 대마초를 구해 길거리에서 피워대다가 경찰한테 붙잡혀갈뻔 했을 때 경찰도 봐줬었지. 포스트잇으로 헤어진 여자라니깐.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버거. 잘 살고 있니? 포스트잇 사랑 - 나는 한때 캐리의 남자였다, 라고 책 한권 내지 그러니. 


   나는 알렉산더가 버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캐리의 남자들을 빅, 에이든 부류가 있다면 버거, 알렉산더 부류가 있다 이 말이지. 빅, 에이든 부류는 헤어진 뒤에도 가끔씩 그립고 생각나서 애뜻한 부류라면 버거, 알렉산더는 그런 순간이 떠올라고 사랑했던 나를 떠올리며 추억하지 그 사람에 대한 애뜻한 추억따위는 없을 것 같은 부류다.
   사실 알렉산더랑 캐리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였다. 처음에 딱 보기에도 그래 보였잖아. 알렉산더는 일단 나이가 너무 많았고, 클래식한 스타일이였다. 예술가여서 창의적이고 개방적인 면이 있다고 쳐도,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캐리 친구들 커플을 초대해서 식사하는 에피소드를 보자. 친구들은 그 때 근사하게 차려진 식탁 위에서 자위기구 이야기를 했다. 그게 캐리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그게 캐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그는 불편해하고 불쾌해했다. 그래, 아침을 직접 차려주고, 좋은 드레스에 근사한 집, 피아노 연주도 직접 해주면서 사랑을 속삭였지. 좋았다. 사만다의 말처럼 너무 클래식하지만 여자들은 가끔 그런 사랑을 꿈꾸잖아.
   알렉산더랑 사귈 때가 캐리가 많이 변했다. 수동적인 여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알렉산더가 같이 파리로 가자고 하면서 캐리는 캐리이기를 포기했다. 일도 버리고, 너무나 소중한 친구들도 멀리하고 알렉산더, 그 남자 하나만을 위해서 파리로 갔다. 철저한 뉴요커 캐리가 알렉산더 뒤꽁무리를 따라 파리에 살러 간다니. 그리고 캐리는 점점 외로워졌다. 이때부터 알렉산더는 변하기 시작했다. 일을 버리고서 따라오라고 했던 캐리와는 달리, 점점 일에 집착하면서 캐리를 보지 못하는 알렉산더. 야망이 큰 남자. 로맨티스트이긴 하지만 이기적인 로맨티스트.
   캐리가 자신의 이니셜목걸이를 잃어버리고, 그걸 찾게 되면서 캐리는 진짜 캐리로 돌아간다. 뉴욕을 사랑하는 캐리, 일을 사랑하는 캐리, 친구들을 사랑하는 캐리. 그런 캐리로 돌아오자 짜잔, 하고 캐리의 남자 빅이 나타나지. 이제 진정한 캐리로 돌아온거지. 마지막 캐리가 브런치 모임에 짜잔하고 나타났을 때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단 말이지. 히.
   마지막 나레이션도 좋았다. 섹스앤시티에서 캐리의 나레이션은 정말 좋아서 다 적어놓고 싶다. 어떤 에피소드에선지 모르겠는데, 캐리가 누군가와 헤어지고 이런 나레이션 한 적이 있는데, '사랑이 끝나고 가면, 그 사랑은 어디로 가 버리는 걸까?' 였나? 확실하지 않은데, 이 나레이션이 너무 좋았다.

마지막 나레이션.

그날 저녁 난 관계에 대해 생각해봤다. 새롭고 이국적인 것에 눈을 뜨게 하는 관계.
그리고 낡고 익숙한 관계. 많은 의문을 갖게 하는 관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끄는 관계. 처음 시작한 곳에서 멀리 나아가게 하는 관계.
그리고 모든 걸 소생시키는 관계.
하지만 가장 흥분되고 도전적이고 중요한 관계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만일 사랑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이를 만난다면, 정말 근사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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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왕창입니다. :)


   최근에 내가 본 드라마시티는 굉장히 신선한 소재들이 많았다. 몇주 전의 <GOD>도 미래의 도시를 배경으로 기억이 조작되는 것, 그 속에서 내가 나의 기억을 믿을 수 없고,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사람들도 믿을 수 없게 되는 이야기였는데,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미래의 사회를 배경으로한 꽤 철학적인 주제라 흥미롭게 시청했었다. 오늘도 리모컨 돌리다가 보기 시작했는데, 꽤 재밌어서 끝까지 봤다. <인 터널>. 한  터널 안에서 마주치게 된 나의 과거, 너의 현재, 그리고 당신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고 시간이 이동된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애니 속 치아키는 자신의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한 그림을 보러 과거로 찾아온다. 처음 애니를 봤을 때, 고작 그림 하나때문에? 라고 생각했는데. 비오는 어느 날 오후, 가만히 창밖을 보다가 언젠가 비가 오지 않는 시간이 올까, 라고 생각해봤다. 오염되고 환경이 파괴되 미래에는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비가 내리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라면, 그리고 비가 내리는 시간들이 소중했던 어떤 사람이라면, 비가 내리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과거로 찾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나라면 그럴 거라고.

   <인 터널>도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과거에 대해 후회를 하곤 한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더 했었으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엔 부모님께 좀 더 효도했었어야 했는데. 그 사람과 헤어진 후엔 그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는 이렇게 헤어지지 않을텐데.

   우연히 터널 안에서 세 대의 차가 사고가 나게 되는데, 세 사람은 얼마지나지 않아 이 터널에는 차들이 전혀 다니지 않고 이 터널 안에 자신들과 자신들의 시간이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각자 터널 안으로 들어오기 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지연. 23살의 그녀는 과거다. 2005년에서 이 터널로 들어왔다. 연예인 지망생이고. 이 여자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는 27살의 강준성. 그는 현재다. 터널로 들어오기 직전, 그는 2006년을 살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한 남자. 그리고 33살의 김영호. 그는 미래다. 형사같은 기자이고, 2007년을 살아가고 있었다. 연쇄살인사건을 취재하고 있다.

   결국 터널 안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이거다. 한지연은 2005년에는 살아있지만, 2006년에 살인을 당해 죽게 된다. 2006년 지연과 준성은 우연히 만났고, 예기치않게 준성은 지연을 칼로 찌르게 된다. 지연은 준성을 대리운전 기사로 오해했고, 준성은 지연의 집에서 돈만 가지고 나오려고 했는데, 이 때 눈을 뜬 지연을 준성은 칼로 찌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7년 영호는 4건의 동일범으로 보이는 연쇄살인사건을 취재 중이고 터널 안에서 자신이 찾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준성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반전이 있는데, 터널을 빠져나온 뒤 밝혀진 사실은 결국 지연을 죽인 사람은 준성이 아닌 영호였다는 사실이다.

   조금 복잡하지만 줄거리는 이러하고, 내가 이 드라마에서 재밌게 본 점은 이들이 터널 안에서 겪게되는 심리적인 갈등과 아이러니다. 이건 2005년의 지연과 2006년의 준성, 2007년의 영호가 함께 한 공간에 각자 다른 시간을 공유하면서 만나게 된 까닭인데.

   일단, 지연. 지연은 2005년에는 살아있지만, 2006년의 준성과 2007년의 영호에게는 죽은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1년 후 자신을 죽인 사람과 함께 있지만, 처음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터널 탈출을 시도할 때, 지연은 누구와 함께 나가야 하는지 고민한다. 준성은 자신을 죽인 사람이다. 내가 이 사람과 함께 나가면 내가 살아있는 2005년에 도착할게 될까? 그래서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될까?

   그리고 준성. 가장 많이 갈등하는 인간적인 인물이다. 터널에 들어오기 직전 준성을 사람을 칼로 찔렀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바로 자기 앞에 있고, 영호는 자신에게 1년 후엔 자신이 4명의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라 한다. 지연을 죽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그렇지만 왜 내가 살인을 한걸까? 왜 내가 3명을 더 죽인걸까? 그리고 터널 탈출 때, 영호와 함께 가면 준성은 분명 감옥행이다. 지연과 함께 가면 모든 것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연이 죽지 않은 그 때로. 2005년으로 돌아간다면, 그런 끔찍한 미래따위는 없을텐데.

   마지막으로 영호. 영호는 반전의 포인트다. 영호는 지연이 쉽게 살아가는 것에 염증을 느껴 그녀를 해치려고 찾아갔는데 지연은 이미 준성의 칼에 찔린 후다. 지연은 그 때 죽지 않았다. 겨우 한번 찔린 거였고, 충분히 살아날 수 있었는데 영호가 지연을 죽인거다. 그리고 지연의 목걸이를 하고 터널 안으로 들어온다. 터널 안에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영호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철저히 숨긴다. 유일하게 두 사람과 그와 관련된 사실을 모두 기억하는 영호에게는 사실 심한 심리적 갈등따윈 없다. 오직 이 곳을 탈출하는 것. 그리고 자기 대신 준성을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것뿐이다.  준성은 터널 안에서 뭔가 기억하는데, 이건 지연의 목걸이를 영호가 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때는 터널을 탈출하는 중이였고, 터널을 나오자 2007년이였고 터널 안의 모든 기억은 지워졌다.

   터널 안에서의 갈등은 누구와 함께 나가야 내가 살 수 있는걸까? 세 시간 중 내가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인데 결국 드라마는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다. 지연과 준성이 그렇게 원하던 2005년으로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던 2006년으로도 돌아가지 않고, 지연과 준성의 미래지만 영호의 현재의 2007년으로 돌아간다. 터널 안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남아 결국 모든 사실은 밝혀진다. 준성은 그 전에 자살하고 말지만. 준성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준성이 1년 후 연쇄살인범이 된다는 미래를 알게 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흥미롭다. 1년후 자신이 살해당할 거라는 걸 알게되는 지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하지만, 결국 자신의 미래가 살인범이나 죽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분명한 미래의 사실일 때에 혼돈스런 인간의 마음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미래도 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서 흐르는 것이므로 시간이 멈춰버린 인 터널에서 절망한다.  

   철학적인 드라마였다. 좋았다. 인 터널. 그런 터널이 있다면, 나는 누구를 만나게 될까? 과거의 어떤 사람? 터널 안에서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 어떤 말을 나에게 해주게 될까?    


드라마시티(2007.08.04)
인 터널
황인혁 연출
김희숙 극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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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찬의 서툰 고백

from 티비를보다 2007. 7. 26. 22:45

   요새 내 주위엔 온통 커피프린스 보는 사람들. 다들 고 말랑말랑한 순정드라마에 빠져버렸다. 메리메리가 가고난 빈자리를 깔끔하게 채워주었음.

   그리고 자주 놀러가는 백은하 기자님의 홈피에서 너무나 감성적인 글을 발견했다. 은찬이 한성에게 고백하는 씬에서 떠오른 예전 대학 신입생 시절의 서툰 고백에 관한 것인데, 나는 이 글이 좋아서 하루에도 몇번씩 가서 읽고 있다. 이 글 속에 그려진 그 가을의 풍경과 두근거림과 눈물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펼쳐진다.

   신입생때는 다들 서툰 고백에 설레여하고 마음 아파하는 법. 내 친구의 비오는 날 삐삐 음성 고백 뒤에 기숙사 방 구석에서 원샷으로 들이켰던 소주 한 병의 추억따위가 너무나 귀엽고 풋풋해서 절대 잊혀지지 않는, 다들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는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는 신입생의 서툰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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