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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군산에 다녀왔다. 군산에 간 건 11월호 <트래블러> 기사 때문이었다. 제목은 '60년 전의 낭만, 군산 빈티지 여행'. 최갑수 시인의 글이었다. 이 글을 어느 토요일 오전 동네 이마트 안의 스타벅스 안에서 읽었는데, 예전에 곡예사 언니가 빵 먹으러 친구랑 군산에 간다는 말이 생각나 언니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언니가 그랬다. 군산 좋았다고, 꼭 가보라고. 그래서 다녀왔다. 처음엔 빵 먹으러 군산에 간다는 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내려가서 줄을 서서 이성당의 야채빵과 단팥빵을 먹으니 빵 먹으러 군산 간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올라오는 날 팥빵 열 개를 더 사서 오늘 엄마에게 부쳤다. 엄마가 호두과자를 좋아하니 이성당 팥빵도 좋아할 것 같았다.
어디론가 가야 할 거 같아. 철길이 있고 예쁜 창문이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 군산으로 가라고 했다.
- 최갑수, 60년 전의 낭만, 군산 빈티지 여행 p. 187 <트래블러 11월호>.
결국 철길은 가지 못했다. 최갑수의 글은 철길로 시작해 철길로 끝난다. 군산을 가기 전에 보았던 <한국인의 밥상> 8.15 특집 편에서도 철길이 등장했다. 경암동의 철길마을. 검색창에 '군산 철길마을'이라고 치면 철길 옆으로 옛스러운 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가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가려고 했었다. 첫날 밤 해질녘에는 이 마을을 찾아 헤매다 바다 끝에 있는 묶여 있지 않은 개를 만났다. 개가 우리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바람에 심장이 터질 줄 알았다. 내겐 짖는 개 트라우마가 있다. 사촌동생이랑 동네 개들 사이에 둘러싸인 경험이 있다. 개는 우리를 향해서 짖고 우리가 움직이면 달려들려고 했다. 친구 뒤에 숨어서 우리는 물릴 거다 생각했다. 친구는 절대 등을 보이지 말라고 했다. 군산에서 내가 마주 본 바다는 황량했다. 배는 있었으나, 바다 위에 떠 있지 않았다. 고요했다. 폐허같은 바람이 불었다. 결국 개는 짖고 짖다 누군가가 나타나자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우리는 뒷걸음을 쳐 바다 끝을 빠져나왔다. 둘째날 철길마을을 가려고 하는 우리에게 두 명의 택시기사가 거기에 왜 가려고 하냐고 핀잔을 줬다. 거긴 볼 게 없다고. 거긴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차가 없는 우리에게, 군산은 택시로 이동해야 하는 도시였다.
군산의 밤은 우물처럼 고요했고 평화로웠으며 약간은 쓸쓸했다. 항구도시의 시끌벅적함과 번잡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치고 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쿡, 하고 수줍게 웃어주는 그런 사람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옆모습은 외로운 그런 사람.
- 최갑수, 60년 전의 낭만, 군산 빈티지 여행 p.187 <트래블러 11월호>
첫날은 잘 돌아다녔다. 군산을 작은 도시로 생각했다.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숙소를 예약을 하고 둘 다 일에 바빠 여행계획을 세우질 못했다. 군산은 작은 도시니 버스나 택시를 타면 금새 이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큰 도시였다. 친구는 말했다. 군산은 칠레처럼 긴 도시네. 새만금에 있는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가면서 아저씨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이 도시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구나, 싶었다. 서울로 올라와 <한국인의 밥상>을 다시 봤는데, 어쩌면 우리가 군산에서의 둘째날 우울했던 이유가 날씨 때문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둘째날, 군산에 어둠이 찾아올 무렵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폭우 같은 폭설이 쏟아졌다고 한다. 군산에서 비를 맞으며 버스를 타고 올라가면서 대전 즈음에서 눈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빨리 눈으로 바뀌었다.
마룻바닥을 걷다 보면 유난히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는 지점이 있다. 이곳이 바로 히로쓰의 방문 앞이다. 이는 무사 가옥의 특징인데, 삐걱거리는 소리는 자객의 침입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 최갑수, 60년 전의 남만, 군산 빈티지 여행 p. 191 <트래블러 11월호>.
우리는 갔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였던 초원사진관에도 가고 (실제는 창고였다고 한다. 우연히 발견해 사진관으로 세트를 꾸민 것이라고 한다), 국내 유일의 일본식 절이자 고은 시인이 출가를 했다는 동국사에도 가고, 일제시대 당시 큰 포목점을 하며 돈을 벌었던 히로쓰가 지은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에도 하고, 일본식 건물을 게스트 하우스로 바꾼 고우당에도 들렀다. 이곳이 근대역사문화유산거리,라고 이름 붙여진 거리인데, <한국인의 밥상>을 보니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란다. 이성당도 근처에 있다. 네모 반듯한 거리다. 한번 익혀두면 길을 잃을리 없을 것 같은 네모 반듯한 거리. 그 속에 오래된 가옥들이 있다. 그 네모 반듯한 길을 걷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군산은 수탈의 도시라고 했다. 비옥한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어, 일본인들이 이 곳의 것들을 그렇게 많이 수탈해 갔다고 한다. 항구여서 수탈한 것을 이동해 가기도 쉬운 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곳. 걷으면서 그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전에 탔던 택시의 기사님이 근대역사문화유산거리 구석구석을 잘 소개해줘서 헤매지 않고 잘 구경했다. 숙소로 이동할 때 다시 연락을 했다. 명함을 받아뒀었다. 아저씨가 고맙다며, 버스 이동이 불편한 군산의 특성상 차가 없는 우리가 가지 못한 은파유원지를 요금에서 빼고 둘러 지나가 준단다. 사실 유원지를 보며 추운 날, 이 인공적인 불빛을 보려고 걸어오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저씨가 말했다. 4월에 말이예요. 여기가 장관이에요. 이게 다 벚꽃나무거든요. 벚꽃나무가 터널을 이뤄요. 그때는 사람이고 차들이고 다 여기에 모여서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예요. 정말 아름다워요. 깜깜한 거리를 지나며 4월의 벚꽃잎 날리는 풍경을 상상했다. 4월에 또 오면 좋겠다, 생각했다.
내 고향 군산은 / 한밤중에도 뱃고동소리가 들립니다 // 내 고향 군산은 / 뱃고동 소리 들으며 아이들이 돛대처럼 자랍니다 // 내 고향 군산은 / 언제나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 안개 걷히우며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 가슴 설레어 // 내 고향 군산은 / 바람 부는 항구입니다 / 먼 나라의 깃발들 / 여기 와 하루 내내 휘날리고 있습니다. // 아, / 내 고향 군산은 / 오래오래 바다의 시작입니다.
- 군산에서 보았던 고은의 시.
첫날 먹었던 식당에서 내준 박대구이가 너무 맛있어서 어두운 날씨에 수산시장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둘째날 숙소에서 느긋하게 번갈아 반신욕을 하며 계획했던 철길마을을 보고 늦은 점심을 먹고 서울로 가 뒤풀이를 하자는 일정을 지켰다면 어땠을까. 숙소의 직원 분이 어느 식당 백반과 은파유원지 근처의 커피집과 근대역사박물관을 추천해주는 바람에, 우리의 일정이 틀어졌다. 그리고 날씨가 흐려졌고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군산대학교까지 한 시간에 한 대 있던 버스 시간을 때마침 맞추었던 것을 제외하고, 매번 택시를 타야했다. 군산의 황량한 바다의 칼바람을 그대로 맞았다. 첫날은 따뜻했는데, 그래서 외투를 벗을 정도였는데 다음날은 추웠다. 외투의 옷깃을 여러 번 여맸다. 그렇게 고생 끝에 여섯시 십오분 서울행 버스를 탔다. 고단했다. 그런데, 뭐랄까. 마음 한 구석이 뜨끈하고 서늘해지면서 계속, 혹은 이따금 생각나고 챙겨주고 싶은 친구처럼, 군산이 그렇게 마음에 남았다. 몹시 추웠는데, 그 온도가 고스란히 몸에 남았다. 새만금도, 근대역사문화유산거리의 여러 일본식 건물들도. 길을 지나가며 만난 오래된 풍경들도 오래 남았다. 그 풍경들을 깜깜한 버스 안에서 되새겼다. 다음엔 택시를 여러 번 타지 않고 머무르며 둘러보고 싶었다. 같은 곳을 여러 번. 사람들이 드문 시간에. 사월에 갈 수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복잡대는 벚꽃 터널 길을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곡예사 언니 말처럼 좋았다. 마음에 많이 남았다. 그냥 군산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를 그곳에서 보내길 잘했다. 그리고 원래 계획처럼 혼자 남아 더 둘러보질 않아서 다행이다. 혼자 남았다면 눈이 왔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눈은, 아주 추운, 추운 눈이었을 것 같다. 조금은 울고 싶어 혼자 남고 싶었는데, 울지 않길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