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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월의 산내
    여행을가다 2012. 11. 19. 14:08

     

       새벽에 천둥소리가 들렸다. 비가 온다더니 많이 올 건가 보다, 생각하며 다시 잠들었다. 다시 새벽,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고, 계속 껐다. 여섯 시 즈음의 알람을 끄지 않고 계속 두었더니 동생이 시끄럽다고 좀 끄라고 한다. 알람을 끄고, 동생한테 언니 오늘 회사 안 나간다. 알아서 일어나, 하니 동생이 진짜? 하며 벌떡 일어난다. 내가 일어나서 부시럭거리며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 동생이 일어날 시간. 동생에겐 내가 알람이다. 주말동안 계속 몸을 움직여, 늦잠을 잤다. 일어나서 케이블에서 해 주는 무한도전도 보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도 보고 뒹굴거리다 빨래를 돌리고, 밥을 먹었다. 타이니 팜 밭에 딸기를 거둬들이고, 당나귀와 점박이 돼지, 점박이 염소들에게 먹이를 주고, 검은 닭에게 애정을 줬다. 그리고 오늘은 휴가니까 30분 후에 수확할 수 있는 목화씨를 뿌렸다. 오늘의 계획은 미용실에 가고, 극장에 가고, 커피집에도 가는 거였는데 여태 이렇게 뒹굴거리고 있다. 더 늦어지면 쓸 수 없을까봐, 시월의 산내 풍경을 적어둔다.

     

       지리산 둘레길이 있는 전라도 남원시 산내면. 여기서 10월에 5일을 보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인터넷 검색을 하다 건너 건너 알게 된 게스트하우스. 이름도 이쁘다. 오월감꽃시월홍시. 여기서 5일을 머물렀다. 푹 쉬고, 뭔가 많이 기록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머물렀는데 처음 삼일은 열심히 일기를 쓰다가 역시나 나머지 이틀은 거의 쓰지 않았다는. 첫 날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혼자 맞는 밤. 혼자 맞는 아침.

    게스트하우스의 구들방을 주인언니가 내주었다.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때워주는데, 가만히 누워 있으면 오가는 슬리퍼 소리가 들린다.

    티비도 없고, 친구도 없는 밤. 일찌감치 이불을 깔고 누웠다.

    게스트하우스 개 보리가 짖는 소리. 주인언니가 보리를 타이르는 소리.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깼다. 꿈을 꿨다. 깼다.

    7시 넘어 깼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주인언니의 슬리퍼 소리가 들린다.

    엄마에게서 '공기가 다르지요?' 라는 문자가 와 있다.

    정말 다른 공기다. 춥고, 차갑고, 그래서 맑은 공기.

    샤워를 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숙소를 나섰다.

    동네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실상사까지 산길을, 냇길을 걸었다.

     

     

     

     

       5일동안 매일 이런 시간을 보냈다. 책 읽고, 자고, 일어나고, 씻고, 실상사에 다녀오고, 커피를 마시고, 차를 마시고, 동네 음식점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걷고. 화요일에는 주인언니 부모님이 오셔서 저녁을 얻어먹었다. 언니 어머니께서 들깨버섯탕을 해주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두 그릇이나 먹고, 요리법을 물어보고 기억해뒀다가 집에 와서 해먹었다. 그런데 그 맛이 안 나더라. 정말 맛있었다.

       수요일에는 친구가 내려 오기로 했다. 친구가 기차를 타고 와서 여기 버스 시간이랑 안 맞아서 친구도 나도 오래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실상사에 다녀오고, 숙소 부엌에서 책도 읽고 차를 마셨다. 그러니 주인언니 어머니께서 따끈따끈한 호박전을 가져다 주셨다. 이것도 정말 맛있었다. 친구는 도착해서 너는 여기서 먹는 이야기만 보내느냐고 완전 어이없다고 타박을 줬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친구도 먹는 이야기만 하게 됐다. 우리 이거 하고 뭐 먹을까. 내일은 이거 먹자. 둘 다 서로 어이없어서 웃음만.

       목요일에는 주인언니와 맥주를 마셨다. 언니는 맛있는 피자를 구워주었고, 우리는 맥주를 사갔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언니와 내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나는 우리가 도플갱어가 아니냐며 신기해했다. 더군다나 언니는 진주 사람. (나 고등학교를 진주에서 다녔음.) 감기 때문에 그날 많이 마시지 못했지만 언니도 맥주 마니아였다. 직접 맥주를 제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맥주를 우리에게 꺼내줬다. 흑맥주였다. 파는 맥주랑 맛이 다른데, 맛있었다. 친구랑 나는 얼큰하게 취해서 복숭아 물을 들이겠다며 한밤 중에 비닐을 꽁꽁 싸매고 잤는데 나는 결국 자다가 취기도 있고 갑갑하기도 해서 몇 개 풀어버렸다는.

       금요일 아침에는 언니가 숙취는 없냐면서 모닝커피를 대접해주었다. 한옥 마루에서 잘 가꾸어진 마당을 내다보며 LP로 김광석과 라비앙 로즈를 들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좋다, 아 좋다, 라는 말을 연발했다. 그리고 숙소를 나와 남원을 둘러보고 서울 도착. 주말에는 민트페스티벌에 가서 에피톤도 보고, 소란도 보고, 브로콜리도 보고, 몽니도 보고, 스탠딩 에그도 보고, 데이브레이크도 보고, 윤상도 보고, 하와이도 보고, 마이앤트메리(!)도 봤다.

     

       쓰고 보니 바로 어제 일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일 같기도 하고. 좋았다. 조용한 동네도 좋았고, 조용한 숙소도 좋았고, 주인언니랑 알게 되어서 좋았고. 겨울에 가도 좋을 것 같다. 눈이 오면 따끈한 구들방 이불 안에 누워서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잠들고, 문 열어놓고 눈 내리는 거 보고. 이번 달 내내 우울한 생각들 뿐이었는데, 힘을 내야겠다. 12월에는 좋은 일들이 많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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