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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위해 웃다 - 휴일의 음악
    서재를쌓다 2009. 5. 5. 23:23

       어린이날의 계획은 하루종일 집 안에서 뒹구는 것이었다. 책도 읽고, 드라마도 보고.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막내 동생에게 자장면을 사달라고 졸랐다. 막내 동생은 언니가 어린이냐고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곧 내게 돈이 들어오는 날이 가까워지는 것을 깨달은 동생은 빨리 중국집에 전화를 걸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어린이날, 어린이도 아닌 주제로 자장면을 얻어먹었다. 주소를 말하자 중국집 아저씨는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미란다가 광분한 그 중국집의 여직원처럼 아, 거기 알아요, 라며 껄껄거리셨다. 미리 삶아놓은 게 분명한 면발은 불어있었지만, 동생이 사준 자장면은 맛있었다.

       친구의 연락을 받고 대충 앞머리만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지만, 친구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그래서 대학로의 약속이 있는 막내 동생과 집 앞 파리빠게뜨에 가 천원짜리 아이스티와 천원짜리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거기서 나는 책을 읽고, 동생은 공부를 약간 한 후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약속도 없고 집에 바로 들어가기가 아쉬워 영화라도 보러 갈까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마트에 맥주를 사러 가기로 했다. 요즘 다시 <연애시대>를 보고 있는데, 좋아서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맥주를 사서 창문을 잔뜩 열어놓고 <연애시대>를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마트에서 맥주를 사서 돌아오는데, 내가 좋아하는 골목길의 초등학교 교문이 열려있는 거다. 늘 나는 늦은 시간 이 길을 지났으니 어두운 학교와 닫혀있는 교문만 볼 수 있었는데, 오늘은 밝은 학교와 열려있는 교문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망설이다 들어갔다. 초등학교는 정말 오랜만이다, 라는 생각에. 구석구석 구경하고, 운동장 한 쪽 벤치에 앉았다.


       아, 오늘 날 초등학생들은 국민학생이었던 내가 가져보지 못한 텃밭을 가지고 있었다. 따 먹으면 뒤지는 텃밭. 엠피쓰리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노래들을 들으며 그 곳에서 한참을 있었다. 아이들은 누우런 운동장에서 야구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뜀박질을 했다. 엄마, 아빠와 나온 아장아장 걷는 조그마한 여자아이도 있었고. 모두들 행복해보였다. 덕분에 나도 행복해졌다. 그러다 읽다 만 책이 생각나 가방에서 꺼내 펼쳐들었다. 정한아의 첫 번째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


       나는 휴일날 오후 초등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이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 '휴일의 음악'을 읽었다. 이 단편은 문예지에서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소설이었다. 유부남을 사랑하는, 사랑했던 여자들이 나오는 소설. 어떤 구절을 읽고 있는데, 쨍-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운동장 한 구석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쇠방망이에 테니스공이 쨍-하고 맞았다. 안타였다. 아이가 뛰었다. 1루를 지나, 2루를 지나, 3루까지 갔다. 그 때 내가 읽고 있던 구절은 이 부분이었다. "요양원까지는 길이 멀어서 서두르지 않으면 온종일 도로 위에 서 있어야 했다. 새벽공기에서 잉크 냄새가 났다."  그리고 운동장 한 구석에서 다시 읽은 소설의 이 구절에서 마음이 찌릿했다.

       장한아의 소설집은 이 계절에 읽기 좋은 책이다. 따스한 책이고, 따스한 계절이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든 건 4월에서 5월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이 소설집의 어떤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이건 이 계절에 맞는 느낌이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겨울에도 좋겠다. 추운 계절이니, 따뜻한 이야기가 필요할 테다. 이 책의 소재들은 따스할 게 없는 것들인데, 작가의 기운 때문인지 소설은 모두 따스하다. 2미터 넘게 자라는 거인병에 걸린 엄마, 아프리카를 꿈꾸며 몸을 파는 나, 거기에서는 모든 걸 다 소진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스라엘에 있는 협동농장으로 향하는 나, 할머니의 의자를 비밀을 알게 된 나, 모든 걸 다 잃어도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아빠, 생일에 비가 오면 자신과 꼭 닮은 귀신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그는 봤다. 그 날. 반으로 쪼개진 돌),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나. 

        전생이 있다면, 정한아는 적도 근처의 따뜻한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그녀가 소설 속에서 이야기하는 아프리카며, 아르헨티나며, 이스라엘이며는 모두 우리가 사는 곳보다 적도 가까이 있는 나라들이다. 그녀는 아마도 그 나라를 꿈꾸거나, 그 나라를 다녀온 뒤 이 소설을 썼을 거다. 그녀는 따스한 기운으로 충만한 사람. 또 정한아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은 할머니, 가정이 있는 남자, 돌. 왠지 그녀의 소설보다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기분이다. 또랑또랑하게, 밝고 맑게 웃고 있는 커다란 사진 속의 작가.

       흠. 그러니깐 나는 2009년의 어린이날에 자장면을 먹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앉아있었으며, 정한아의 소설을 읽으면서 보냈다. 아, 지금은 맥주를 마시고 있고. <나를 위해 웃다>의 마지막 소설 '휴일의 음악'에는 휴일에 무얼하고 보냈냐고 조사를 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 '나'는 모래사장의 들어올린 모래와 같은 표본의 어떤 이에게 전화를 걸어 묻는다. "지난 주말에는 무얼 하셨나요?" 그러니까, 그 소설에서처럼 누군가 모래사장에서 들어올린 모래와 같은 표본이 되어 내게 전화를 걸어와 "지난 어린이날에는 무얼 하셨나요?"라고 묻는다면, 내가 좀 할 이야기가 있다는 이야기다.  


    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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