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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여름의 판타지아
    극장에가다 2015. 6. 14. 01:37

     

     

     

        N언니는 내게 만선호프에 가봤느냐고 물었다. 언니도 처음 가봤는데, 을지로에 있는 호프집이라고, 앉자마자 사람 수대로 생맥주와 노가리를 내어오는 집이라고 했다. 맥주 잔을 비우는 순간, 다음 잔을 가져다 주는 집이라고 했다. 을지로 직장인들의 휴식처라고 했다. 가격도 저렴하다 했다. 초봄부터 나가기 시작한 독서모임이 있다. 모두 다 영화를 좋아해서 <한 여름의 판타지아>를 보고 술을 마시자고 제안을 했고, 결국 여러 사정으로 3명이 모였다. 영화는 보지 못하고 만선호프에서 맥주를 마셨다. 을지로에서 1차를 마치고 2차를 위해 홍대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중간에 비가 살짝 내렸다. 어디로 갈 건지 연남동에 사는 G에게 물었다. G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랬다. 우리 집에 가자. G의 집에는 영화포스터가 가득했고, 무언가를 옮겨 적은 종이들이 가득했고, 책과 음반이 가득했다.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G가 틀어주는 LP음악을 들으며, 맥주와 소주를 각각 마셨다. 누군가 노래방에 가자고 했고, 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노래방에서 마지막에 S가 자우림의 노래를 불렀다. 제목이 '스물 다섯, 스물 하나'. S가 차분하게 이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 들어보는 나는 이 노래가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가사도, 음도. 그래서 오늘 맥주의 숙취로 하루종일 누워 있다 안 되겠다 싶어 저녁영화를 보러 집을 나섰는데, 이어폰을 꼽자마자 이 노래를 찾아 들었다. 스물 다섯, 스물 하나.

     

       일본 어딘가에 있는 작은 도시 고조시. 영화는 그곳을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두 이야기는 여러 군데 맞물려 있다. 젊은이들은 이 작은 도시에 머물지 않고, 더 큰 도시를 향해 떠난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만 남아 있는 도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도시. 한때 임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던 도시. 그래서 커다란 나무들이 무성한 도시. 챕터 2에서 이 고조시를 여행하며 뭔가를 찾던 여자와, 대도시에 있다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으로 와 감을 키우고 그 감을 따 정성스럽게 말리는 일을 하며 정착한 남자가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장면. 이 장면에서부터 내 심장이 제대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여자의 숙소 앞에서 두 사람이 마지막 시간을 마주했을 때, 여자가 남자의 손등에 무어라고 쓰기 시작하고 이미 여자에게 흠뻑 젖은 남자가 그 여자를 바라볼 때, 온 몸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남자는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야기하고 싶고, 함께 있고 싶었어요. 여자와 남자는 역 앞 안내소에서 우연히 만났다. 여자는 신마치 길로 가고 싶어했고, 남자는 신마치 가는 길은 천천히 걸으면 좀 오래 걸려요, 라며 자연스럽게 신마치 길까지 함께 걸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여자의 숙소 앞에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스틸 사진으로 포토티켓을 만들었다. 좋은 책을 읽을 때 꼽아 두고 읽고 싶다. 티켓의 뒷면에는 오늘의 시간과 오늘의 날짜와 오늘의 자리가 적혀 있다. 그리고 불광천을 천천히 오래 걸었다. 걸으면서 어제 S가 불러주었던 스물 다섯, 스물 하나를 반복해서 들었다. 김윤아가 노래한다. '그 날의 바다는 퍽 다정했었지. 아직도 나의 손에 잡힐 듯 그런 듯 해. 부서지는 햇살 속에 너와 내가 있어. 가슴 시리도록 행복한 꿈을 꾸었지. 우 그날의 노래가 바람에 실려 오네.' 그러다 응암역에 도착했는데,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서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물가에 앉았다. 물가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있었다. 한 켠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 왔다. 여름 바람과 여름 영화, 그리고 여름 맥주와 여름 음악. 한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대고 물가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한참을 혼자 맥주를 마시더니 친구에게 전화를 걸더라. 남자아이는 십여 일이 지나면 입대를 한다 했다. 친구에게 사치스럽지 않은, 좋은 여자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아, 좋은 토요일 밤이다, 라고 생각하며 맥주 캔을 비웠다. 검색해보니, 고조 시는 나라 현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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