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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
    극장에가다 2015. 5. 12. 23:18

     

     

     

       지난 일요일. 안국역의 작은 극장에 있었다. 그날 극장 이벤트로 <리틀 포레스트>를 단돈 만원에 연이어 볼 수 있었다. 집에서 혼자 보았던 여름과 가을을 극장에서 다시 한번 혼자 봤다. 겨울과 봄은 친구와 함께 봤다.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 사계절 동안 계곡과 산, 논으로 둘러 쌓인 일본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여자아이가 농사를 짓고, 살림을 하고, 밥을 지어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무 열매를 따서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잼을 만들어 먹고, 직접 재배한 토마토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계곡에서 딴 나물줄기를 잘게 다져 맨밥에 얹어 먹고, 직접 딴 밤을 졸여 간식으로 먹는 장면을 지켜봤다.

     

        카레. 카레도 있었다. 여자 아이는 동네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친구는 동료를 도와준 이야기를 했다.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건 진정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야. 친구가 가만 있다 말했다. 너는 항상 그러더라.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그게 그 사람을 위한 건지, 아닌 건지 정말 알지도 못하면서. 다음 날 여자아이는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걷는다. 그 깊은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친구가 와 있었다. 커다란 냄비를 들고서. 카레 만들어 왔어. 같이 먹자. 어제는 미안했어. 두 사람은 평온하면서 담백한 화해를 하고, 함께 카레를 데워 먹는다. 마침 여자아이가 다른 요리에 쓰려고 만들어 두었던 반죽은 난이 된다. 그렇게 먹는 두 사람의 '오늘'의 카레. 그리고 두 사람이 마루에 앉아 나눠 먹었던 봄나물과 봄꽃과 봄생선을 넣어 만든 담백하면서도 꽉 차보였던 봄 스파게티도 기억에 남는다.

     

       어제는 퇴근을 하고 동네 야채가게에서 호두를 샀다. 영화 속 여자아이는 산에서 다람쥐와 경쟁하며 떨어진 호두를 줍고, 호두를 땅에 묻어 겉이 까맣게 썩길 기다린 뒤 망치로 호두껍질을 깨서 꽉 찬 호두알을 이쑤시개로 깨끗하게 빼내고 절구통에 넣어 질퍽하게 될 정도로 빻았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그냥 야채가게에서 호두를 샀다. 집에 절구통도 없어서 믹서기로 곱게 갈았다. 갈은 호두를 씻은 쌀에 간장과 맛술 양념을 하고 새벽에 취사가 되게 예약을 하고 잤다. 여자아이처럼 일을 하다 먹을 수 있도록 아침에 일어나 참기름과 깨를 살짝 섞어 오니기리를 만들었다. 동생 도시락도 만들어 줬다. 간장을 한쪽 면에 더 바르고 후라이팬에 구웠으면 간이 딱 맞았을 것 같은데, 약간 심심하긴 했지만 맛있었다. 동생에게서도 맛있다는 메세지가 왔다. 오늘은 내일의 오니기리를 위해 마트를 들러 연어를 사왔다. 우유도 사고, 계란도 샀다. 계란 코너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고기를 너무 좋아하지만 점점 채식주의자'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던 E가 얼마 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계란은 꼭 풀어 키운 닭이 낳은 것만 산다는 것. 가격을 보고 고민을 하다 방사된 닭이 낳은 알을 샀다. 조금씩이지만 점점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버이날이라 아빠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빠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마가 건강에 좋다고 해서 아침마다 우유에 꿀을 살짝 넣고 갈아 먹고 싶었는데, 마트며 야채가게며 너무 비싸더라. 아빠에게 말하니 밭에 마를 한번 심어 보겠다고 했다. 그게 작년 일이다. 결국 아빠의 작년 마 농사는 폭삭 망했다. 심은 그대로 썩어 버린 것 같다고 했다. 마는 먹고 싶은데, 참 비싸니까 나는 마의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월, 경상남도 어느 마을의 작은 밭에서, 작년에 심어놓은 마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아빠가 전했다. 어쩌면 올해는 아빠의 마를 갈아마실 수도 있겠다는 기쁜 소식. 실패했다고 생각한 일이 결코 실패한 게 아니라는. 아빠가 심은, 죽은 줄 알았던, 그러나 다음 봄을 준비할 뿐이었던, 마에게서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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