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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제천 길 위
    여행을가다 2014. 9. 1. 22:31

     

     

     

     

     

     

     

     

     

     

     

     

     

     

        2014년 8월 15일, 제천의 뜨거운 길 위에 있었다.

     

        전날의 숙취로 고속버스를 타고 내내 잤다. 연휴라 2시간이면 될 거리가 4시간 가까이 걸렸다. 내려서는 바로 올갱이 해장국을 먹으러 가자고 재촉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들이마시니 살 것 같았다. 나름 맛집이었는데, 숙취가 있었던 나만 만족한 맛집이었다. 그릇의 바닥이 보이니 익숙한 흙의 질감이 느껴졌다. 이건 Y언니와 몇 년 전에 왔을 때, 이른 아침, 의림지에서 문을 연 가게를 찾아 한참을 헤맨 뒤 먹은 그 흙의 질감이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는 거의 첫 국물부터 흙이 느껴졌는데, 이렇게 끝무렵에 느껴지는 걸 보니 맛집은 맛집이다, 생각했다. 아, 한여름의 제천이다.

     

        밥을 먹고, 카페인이 필요해 터미널 근처의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갔다. 인테리어가 무척 정성스러웠고, 아기자기했다. 소소한 소품들이 많았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나눠 마시고, 카페에 있는 도장으로 각자의 엽서를 완성했다. 카페는 자매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직접 만든 잡지도 있었다. 한 권의 잡지와 한 장의 엽서를 각자 챙겨 나왔다. 터미널에서 받은 영화제 팜플렛을 보니 시장에서 프리마켓이 열리다고 해서 갔다. 아주 구석자리에서 조그맣게 하는 거여서 찾기가 힘들었다. 포기할라는 찰나에 마켓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S는 녹색 장신구가 있는 목걸이를 샀고, 나는 컵받침을 샀다. 정이 많은 Ss는 시장에서 할머니가 깻잎떨이를 하는데 아무도 사가지 않자 그 자리를 뜨질 못했다. 다음날 홍천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 예정이어서 깻잎을 사기로 했다. 할머니는 2천원에 엄청난 양의 깻잎을 모조리 다 담아주려고 하셨다. 우리는 어차피 다 먹지 못한다며 반만 달라고 했다. 이틀 내내 내 가방에서 깻잎향이 났다.

     

        빨간 오뎅 줄은 너무 길어 먹지 못했다. 청풍호반으로 가는 셔틀을 탔다. Ss는 중간에 버스가 높은 다리 위를 지나갈 때 토끼처럼 깜짝 놀랐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높은 다리를 건너고 있는지 알아? S는 그건 숙취에 시달린 내가 맛이 별로 없었던 올갱이 해장국을 한 숟가락 먹었을 때 나왔던 감탄사라며, 가소로운 것들이라며 우리를 비웃었다. 청풍호수에서 우리의 운전수이자 짐꾼이며 고기를 자르는 일꾼이기도 하며, 끝이 없구나. 아무튼 든든한 H오빠까지 합류했다. S와 H오빠는 돌아오는 봄날에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제천의 밤. 어둑어둑해 호수 따위는 절대 보이는 않는 길을 걸어 행사장에 도착했다. 행사장의 강렬한 불빛에 나방들이 미친듯이 춤을 추는 제천의 밤. 영화 상영으로 가로등을 포함한 모든 불을 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모든 불빛이 꺼지고, 스크린만 환해졌을 때 별이 보였다. 늦여름 호수바람이 불었고, 무성영화가 시작됐다. 일본의 피아니스트가 90분 동안 쉼없이 피아노 연주를 했다. 영화는 제법 유쾌하기도 해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세 팀의 공연이 이어졌는데, 사실 마지막 공연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실제 펼쳐지니 뭉클했다. S는 혼자서 흐느꼈다고 했다. H오빠는 무대 위 그가 던진 말이 지금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고 했다. 전인권 밴드의 무대였다

     

        공연을 하다 전인권이 그랬다. 늙는 거 별거 아니라고. 버릴 건 버리고, 좋은 것만 가지고 나이 들어가면 되는 거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었나. 이건 내가 나 자신에게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갑자기 우루루 빠져 나가서 앞자리로 옮겨 봤다. 콩알만 했던 전인권이 이목구비가 다 보일 정도로 커졌다. 그렇다고 선글라스 낀 표정에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갑자기 전인권이 가인을 무대로 부르더니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갑자기 정원영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무대 위에서 사라졌다. 맙소사. 정원영이 계속 옆에서 건반을 치고 있었던 거였다. 전인권이 사라지고, 정원영이 건반을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행복해졌어, 하필 너를 만났어, 라고 이야기하는 노래. 이건 동생이 어떤 계절에 무척 좋아했던 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는 2014년 나의 제천 노래가 되어버렸다.

     

       전인권은 좋은 공연이란 뮤지션들은 침착하게 공연을 하고, 관객들은 미쳐 날뛰는 공연이라고 했다. 몇 곡을 끝낸 뒤 그가 말했다. 잘 했어요. 무대 위의 그들도, 무대 아래 우리도, 우리 옆에서 지치지도 않고 미쳐 날뛰던 중학생 또래의 남자 아이 둘도, 모두가 잘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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