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일

from 모퉁이다방 2011. 7. 17. 19:46


 


    채널CGV에서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해준다. 1박2일도 안 보고, 나는 가수다도 안 보고 해리포터를 틀어뒀다. 음소거로 해두고 라디오를 듣고 있다. 오랜만에 듣는 라디오. 어제 오랜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오래 전에 사두었던 거라며 클래식 라디오를 줬다. 친구는 커피믹스도 종류별로 챙겨오고, 좋은 향이 나는 차 티백도 챙겨왔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거라며 쌀국수도 챙겨왔고, 귀여운 에코백도 챙겨왔다. 그 많은 걸 종이가방에 넣어왔다. 우린 거의 4년 만에 만나는 거였는데,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삼계탕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팥빙수를 나눠 먹었다.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우산을 펴고, 또 끄고 홍대와 이대를 걸었다. 오늘은 그 친구가 재밌게 본 드라마라며 이것저것을 메신저로 보내줬다. 그걸로 이번 여름을 날 거다. 해리포터도 이제 마지막. 매번 챙겨보진 않았지만(심지어 극장에서 졸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 마지막이라니 왠지 마음이 그렇다. 뭐든 마지막이란 건 서글픈 것. 귀엽기만 했던 해리랑 론과 헤르미온느가 이렇게 장성했고, 나는 그동안 늙어왔고. 배철수 아저씨의 목소리는 간만에 들어도 좋구나. 비가 내려주면 좋을텐데. 

    

 


   명란젓이 참 좋다. 시장에서 명란젓을 한 팩 사서 냉동실에 하나씩 나눠서 넣어뒀다. 그걸 밥이랑 볶아 먹기도 하고, 그냥 구워 먹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구운 명란젓. 그냥은 비릿한 맛이 나서 잘 못 먹겠다. 오늘은 스타게티를 했다. 마트에서 스파게티 면이랑 삿포로 맥주를 사왔다. 냄비에 물과 굵은 소금을 넣고 팔팔 끓였다. 스파게티가 익어가는 동안 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으깬 마늘 한쪽과 껍질을 제거한 명란젓 하나를 넣었다. 기름에 명란알들이 이리저리 튄다. 다 익은 스파게티랑 스파게티 끓인 물 다섯 숟가락 정도를 넣고 볶았다. 그릇에 담고 조미김을 얇게 썰어 장식. 끝. 정말 맛있다. 삿포로 맥주도 맛나고, 스타게티도 맛나고, 티비에선 해리가, 라디오에는 배철수 아저씨가. 괜찮은 일요일 밤이다. 



 

 
    <소중한 날의 꿈>을 두 번 봤다. 어쩌면 한 번 더 볼 지도 모른다. 상상마당에서 매일 10명에게 원화를 주는 이벤트를 한다길래. 이 영화를 보면서 한 사람을 생각했다. 이 사람과 나는 최근에 친구가 됐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우리는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녀는 내 글을 보러 몇 년동안 와 주었고, 나는 최근 그녀의 책 한 권을 선물받았다. 거기에 그녀의 아기자기한 일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책을 읽으니 그녀를 만나본 적 없지만 왠지 만난 것만 같다. 책 속에 네잎클로버를 찾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양산, 쪼그려 앉아도 좋을 편안한 바지, 얇은 지질의 두께가 있는 책, 물, 그리고 5월의 맑은 날, 머리가 복잡해서 잠시라도 무게를 덜고 싶을 때나 밖에 나갈 핑계 없이 한가로울 때면, 동네 가게에 들러 아이스바 하나를 입에 물고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잔디 많은 곳을 물색한다. 잔디 사이로 토끼풀 꽃이 수북하게 올라와 있는 곳이 보이면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 (...) 네 잎 클로버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렇게 정성을 들인 네 잎 클로버를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때다."

     그렇게 찾아서 정성스럽게 말린 네잎클로버를 그녀가 내게 선물해줬다. 그 클로버는 책 속에 끼워져 있었는데 네 잎 클로버 밑에 연필로 그린 조그마한 손이 있었다. 그녀는 그걸 2007년에 찾았다. 그게 2011년의 나에게 왔고. 무려 햇수로 5년 동안이니, 그만큼 근사한 행운이 곧 내게 찾아 올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녀 덕분이다. 그녀의 책을 읽고 다이어리에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한 일을 적어둬야 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오늘 걸은 길이나, 오늘 먹은 과일, 오늘 마신 커피, 오늘 느낀 바람, 오늘 온 비에 관해. 1년 뒤에 나는 또 그 길을 걷고, 그 과일을 먹고, 그 가게의 커피를 마시고, 그 바람을 느끼고, 그 비를 볼 지도 모를 일. 그럼 매년 그 날은 그렇게 그 길을 걷고, 그 과일을 먹고, 그 커피를 마시고, 그 바람을, 그 비를 느껴야 하는 날일 지도 모르니까. 특히 계절이 바뀌고 처음 그 계절을 느낀 날이나, 처음 그 계절의 과일을 먹은 날은 꼭 적어둬야지. 그리고 1년 전 다이어리를 가지고 오늘 해야 할 일을 계획해야지. 우리는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가끔 그녀가 내게 문자로 고양이 사진을 보내준다. :)


 


   맞다. <소중한 날의 꿈> 이야기. 이 이야기 꼭 해야 하는데. 나는 이 영화가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 개봉 일주일도 안 돼 큰 극장에서 다 내리니 속상했다. 10년을 공들여 만든 영화라는데. 이 영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설명하고 싶은데, 잘 안 될 거 같다. 진짜 좋아하는 건 말로, 글로 잘 설명이 안 되더라. 이 영화를 보면, 나와 비슷한 나이라면, 학창시절 생각이 많이 날 거다. 고등학교 때 입던 교복이며, 우리가 한 장씩 나눠썼던 교환일기며, 구름다리에 있었던 아이스커피 자판기하며, ㅁ자 건물 안에 있었던 잔디밭하며, 저녁시간에 창문 밖으로 허리까지 내밀고 보았던 밤하늘하며, 너의 고민들하며, 나의 고민들하며, 내가 사전이며 책 귀퉁이에 적어두었던 꿈 이야기하며, 니가 되고 싶었던 미래와 나의 미래까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영화가 시작되는데 처음부터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이 끝까지 이어졌다.

    좋은 부분들이 아주 많았지만, 두번째 볼 때 내 마음에 들어왔던 건 오이랑과 한수민. 철수랑 이랑이보다 오이랑과 한수민이었다. 꼭 이렇게 성까지 붙여줘야 한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그랬던 것 처럼. 오이랑은 한수민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한수민은 서울에서 전학온 아이. 자기소개를 할 때 짓궂게 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자, 태연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잘 불렀다지. 영화 포스터를 떼어내면서 이게 도둑질이 맞긴 많는데 사람 많은 데서 이러면 괜찮아, 라고 말하는 아이. 33살이 되면 자살을 할 거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이. 어린 남자아이들은 관심 없다고 말하는 아이다. 기역은, 니은은, 으로 시작하는 시를 쓰는 아이.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그 아이가 자신의 시가 실은 형편없이 겉멋만 부린 거라는 걸 아는 순간, 엉엉 울어버린다. 나는 너무 다른 오이랑과 한수민이 친구가 되어가며, 서로 닮아가는 순간순간들이 참 좋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두 사람이 눈밭에 누워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는 오이랑이 한수민 같았고, 한수민이 오이랑 같았다. 그게 참 좋았다. 나는 이걸 만든 사람도, 홍보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이 근사한 애니를 많이들 봐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요즘 때때로 괜찮고, 때때로 슬프다. 이건 여름이랑 안 어울리는데. 가을이나 봄에 이래야 어울리는 건데. 북해도에 가고 싶고, 돈 걱정 없는 백수가 되고 싶고, 근사한 책과 영화들을 섭렵하고 싶은 요즘. 어느 출근길, 이 시가 내 마음을 울렸다.


선우사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허구 긴 날을 모래알만 혜이며 잔뼈만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일루셔니스트>를 봤다. 쓸쓸했지만, 무척 좋았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 누구도 욕할 수 없지. OST가 있네.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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