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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 스님
    모퉁이다방 2010. 3. 12. 00:59

       예전에 근무시간에 손톱을 깎는 분이 계셨다. 일을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톡톡거리는 뚜렷한 손톱깎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분이 손톱을 깎는 오후면, 생각했다. 도대체 왜, 저 분은 집에서 손톱을 깎지 않는가. 집에서 손톱 깎을 시간도 없단 말인가. 오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그 분 생각이 났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집에서 손톱 깎을 시간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하루의 시간을 일하느라, 밥먹느라, 출퇴근하느라, 서글퍼하느라, 힘겨워하느라, 슬퍼하느라 바빠 집에서는 도저히 손톱 깎을 시간이 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그러다 환하고 따듯한 오후가 되면 길고 더러운 손톱이 보이는 거다. 그럼 그걸 그 시간, 그 순간에 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톡톡. 지금 내 손톱이 너무 길다. 그런데 집에서는 자를 시간이 없다.

         일산에서 집까지 긴긴 길을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앉을 수도 잠들 수도 없었다. 잠들어 버리면 종로3가에서 갈아타지 못할까봐. 그리고 금방 먹은 술 때문에 발이 퉁퉁 부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서 졸고, 서서 책 읽다 말고, 서서 음악 듣다 말았다. 오늘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 나는 종로 3가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서서 졸면서,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들으며 가다 길상사 생각을 했다. 지난 겨울, 그 추운 겨울에 찬바람을 뚫고 다녀온 곳. 법정 스님은 그 곳에 입적하셨다고 한다. 올해 초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단단했던 마음을 잃을까봐 하루에 한 꼭지씩 법정 스님의 법문집을 읽었다. 그러다 중간쯤 놓았다. 플레이어를 돌려 시와의 '길상사에서'를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 마지막 세 번의 풍경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술 기운 때문인가. 발이 정말 잔뜩 부었다. 

        여름의 길상사를 생각했다. 가을의 길상사도 생각했다. 겨울이 지나, 봄의 길상사도 생각했다. 특히 초여름의 길상사. 연두빛들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났을 나무들. 그 나무의 잎들을 스치는 쉬이쉬이 바람소리. 오늘 서서, 졸며 읽은 책에 지눌 스님 이야기가 나온다. 지눌 스님은 땅에 향나무 지팡이를 꽂으며 너하고 나하고 생사를 같이 하자, 했다고 한다. 그뒤 지팡이에는 잎과 가지가 무성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스님이 입적하자 그 나무는 말라 죽었다고 한다. 스님은 이 나무가 자신이 떠난 뒤에 마를 것임을 확신했고, 자신이 떠난 뒤에 나무에 다시 잎과 가지가 무성하게 되면 자신이 환생한 것일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나무는 아직까지 살아나지 않고, 썩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법정 스님에게도 스님만의 나무가 있겠지. 내게도 나의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스님의 법문집을 펼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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