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미쓰 홍당무 - 얼굴 빨개지는 아이, 미숙이
    극장에가다 2008. 10. 26. 12:08

    (스포일러 있어요)

     

       맥주를 마시면서 영화를 보면, 영화가 더 재밌다. 동대문 메가박스에는 극장 내에서 맥주를 팔더라. 그래서 하나씩 사서, 테이크 아웃용 컵에 빨대를 꽂고 <미쓰 홍당무>를 봤다. 원래 재밌는 영화가 더 재밌었다. 깔깔거리며 손뼉을 치면서 봤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영화 주제곡인 달파란의 '나도 공주가 되고 싶어'를 계속 들었다.

    점집으로 향했어 / 나의 전생 뭐였을까? / 나는 공주였을까? / 현생에서 이 고생인데
    점쟁이가 말했어 / 넌 전생에 노예였다고 / 씨발 졸라 충실한 개같은 노예
    억장이 무너졌어 / 그게 전분 아닐거야 / 한 번 더 물어봤어 / 노예 전엔 뭐였냐고
    점쟁이가 말했어 / 그 전에 넌 닭이었다고 / 것도 졸라 머리 작은 닭대가리
    그래 그래서 내가 이런가 / 그래 결국 그거였어 / 그럼 나는 언제 공주되나?
    나도 공주 한 번 되고싶어 / 나도 공주 한 번 되고싶어 / 나도 공주 한 번 되고싶어 / 훠훠


       그런데 처음엔 골 때리게 웃기게만 들리던 가사가 어느 순간 서글퍼지는 거다. 영화 속 미숙이도 그랬다. 영화볼 때는 신나게 웃으면서 봤는데, 나중에 미숙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종희도 그렇고. 유리 선생도 그렇고. 영화 중간중간에 그녀들에게서 내 모습이 발견되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때문인가 보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가 마음에 쓰라린 게.

       미숙이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심리학 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남자의 동굴 이론을 신나게 얘기하는 부분이 있다. 이거 나. 같이 간 언니도 꺄르르 웃었다. 그건 너잖아. 옷깃만 스쳐도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할 거란 되지도 않는 착각을 하는 미숙이. 이것도 나. 1등에 목매느니 차라리 목을 매겠다, 포스트잇에 꾹꾹 새겨넣은 미숙이의 철학. 이것도 나. 결혼하기 전엔 절대 섹스하지 않겠어요, 호언장담했지만 좌지까까,를 외쳐대며 엉덩이를 때려대는 유리 선생. 이것도 나. 엄마, 아빠가 이혼한다고 하자,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종희는 끝내 나 엄마, 아빠 친딸 아니지?,라는 말까지 내뱉는다. 이것도 나.

       이 못난이 세 캐릭터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도 그거다. 이건 내가 새겨져 있는 그녀들이니까. 그리고 그녀들은 당당하니까. 미숙이도, 종희도, 유리 선생도 당당하다. 내 사랑에, 내 고민에, 내 바램에 당당한 자신감이 가득차 있다. 그는 나를 사랑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야, 그는 나만 사랑한다고 그랬어. 세 왕따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 나도 사랑스런 아이니, 나도 좀 예쁘게 봐 달라는 맨날 삽질하는, 얼굴 빨간 아이 미숙이. 전교 왕따에다, 주근깨에 투성이에, 매일 눈물 글썽이며 커다란 눈을 부라리는 종희, 예쁜데 마음까지 착하지만, 세상사엔 지독하게 멍한 유리 선생. 이 영화는 사랑스런 영화다. 그녀들도 이제 모두 친구가 되었을 거다. 더이상 왕따도 아닐 거다. 세상에 마음 맞는 친구 하나면 충분하잖아.

       미숙이랑 의사선생이랑의 에피소드가 너무 재밌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 미숙이는 그 후로 세상은 여전히 예쁜 것만 좋아하는 금자씨처럼 개떡같이 달라진 게 없을 테지만, 그래도 조금은 행복하고 당당한 서른을 맞이했겠지? 찐딴지 찐따 애인인지 아직도 모르는 종희도 엄마, 아빠 사랑 받으면서 4차원의 동년배 친구 하나 만들지 않았을까나? 유리 선생은 예쁜 얼굴에 맞는 예쁜 연애 시작했을 테지? 아. 그렇게 생각하니 행복해진다. 그건 나였으니까. 나도 행복해지겠지? 나, 얼굴 빨개진다. 헤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