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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로 가는 길
    극장에가다 2022. 1. 5. 01:16

     

    (스포일러가 있어요)

     

     

      <와인이 있는 100가지 장면>이라는 책을 식탁에 두고 야금야금 읽고 있다. 영화 속 와인을 마시는 장면들, 그 와인에 대한 정보 등에 대한 책인데 짤막한 글들이라 조금씩 읽기 좋다. 읽고 있으면 별로일 것 같아 보지 않았던 몇몇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파리로 가는 길>은 그 중 한 편.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의 실제 경험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주인공 앤이 유명 영화감독인 남편 마이클의 칸느 출장에 동행했다가 컨디션 난조로 먼저 파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시작한다. 이때 마이클의 사업 동료인 중년의 프랑스 남자 자크가 앤을 파리에 데려다 주겠다고 자처한다. 칸느에서 파리까지 자동차로 7시간. 하루 종일 자동차 여행을 하게 될 거라고 짐작했지만, 여행은 그 이상으로 길어진다. 자크는 파리에 가려는 마음이 있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자꾸 샛길로 빠진다. 영화의 재미는 자크의 샛길이 너무 매력적이라는 데 있다.

    - p. 97-98 <와인이 있는 100가지 장면>

     

       흠. 온갖 로맨틱한 상황들이 다 나온다. 오픈카 뒷좌석에 꽃을 가득 싣고 나타난다거나 자동차가 고장나자 돗자리를 펼치고 치즈와 포도를 곁들인 한낮의 와인을 즐기는 등. 프랑스 남자인 자크 이 남자, 모든 행동들이 물 흐르듯 너무 자연스러워 나는 이 상황들이 로맨틱하게 느껴지지가 않더라. 완전 선수! 유부녀도 가리지 않는 작업남. (그런데 남편 그 자식은 뭐냐. 니가 더 나빠!) 결국 여행의 종착지인 파리에서 자크는 그리 과하지 않은 고백을 한다. (역시 선수) 영화는 앤의 묘한 표정으로 끝나는데 나는 그녀가 다 알 거라고 생각했다. 기억에 남을 특별한 여행이었다고. 그걸로 됐다고.

     

      그런 작업남 자크가 좋아보였던 장면이 있는데 베줄레이 성당에서 앤의 가슴 아픈 과거 이야기를 들은 뒤 함께 한 저녁식사 중에서였다. 앤은 여행 중 계속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가 무려 라이카다) 습관 같은 거라고 한다. 자크는 찍은 사진들을 보여달라고 한다. 앤은 망설이다 보여준다. 자크가 놀라며 말한다. "사소한 것들을 잘 잡아내네요. 영감이 넘치는데요. 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전체를 상상하게 만들죠." 자크는 남편에게 보여줬냐고 물어본다. 앤은 보여달라고는 하는데 그냥 하는 말 같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자크는 "20년간 함께 한 남자에게 왜 자기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아요?" 라고 말한다. 카메라를 들어 앤을 찍는다. 그리고 카메라를 건넨다. 봐보라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글을 쓰다보니 이 장면, 이 대사들 또한 자크의 작업 대사구나 싶은데 (로맨스가 온몸에 배인 남자) 오늘의 내게 뭔가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 잠을 잠시 참고 기록을 남긴다. 영화를 보면 여행 가고프다. 남들 다 가는 그런 관광지 여행 말고 앤이 찍는 사진들처럼 사소한 것들을 잘 잡아내는 여행. 느긋하게 움직인 덕분에 미처 가보지 못한 곳들은 상상하게 만드는 여행.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 아, 자크가 돈 갚을 때 영수증 버리지 않고 같이 클립에 꽂아준 거는 아주 좋았다. 그게 내가 본 이 영화 최고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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