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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퉁이다방 2018. 12. 20. 22:03



       지금까지 열한 줄을 썼다가 모두 지웠다. 모두 다 쓸데없는 이야기다. 동생은 요즘 수영에 빠졌는데, 잠수함이라고 놀림을 받다가 결국 배영에 성공했다. 오늘부터 평영을 시작했단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보면 역시 성공하나 보다. 이 쉬운 진리를 나는 왜 늘 잊어버리는 걸까. 나는 포기가 쉬운 아이다. 수많은 포기가 있었다. 방금 동생이 크리스마스 때 강습은 없고 자유수영을 하는데, 수영장에 캐롤을 틀어준다고 했단다. 갈 거야, 크리스마스 날에, 라고 방긋 웃는다. 오늘은 혼자 남아 야근을 했다. 칼퇴를 하지 못한 날은 뭔가 깊은 감정이 드는데, 그건 업무시간에 쉴 틈이 정말 1분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 계속되어도 괜찮을까, 가끔 생각한다. 내년에는 포기하지 않는 무언가를 하나 이상 꼭 만들어보아야지. 그래서 무언가 꼭 성공해보아야지. 


       친구는 다음 날 회식 때 먹은 회로 인해 자신이 식중독에 걸릴 줄도 모르고, 내게 연말 택배를 보냈다. 따뜻해서 자꾸 손이 간다는 잠옷 두개와 직접 뜬 똑딱이 자석이 있는 쁘띠 목도리와 친구네 집에서는 아무도 안 먹는다는 연어캔, 목도리 착용법을 자세하게 적은 엽서까지. 짜증났던 야근은 친구의 택배를 더욱 기쁘게 받기 위한 신의 전략이었을까. 조만간 친구네 집에 가서 코바늘을 배우기로 했다. 주말 오전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바느질을 하고, 친구의 아가가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게 기억시켜주고, 맛있는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동물 얼굴의 컵홀더를 만들어보고 싶다. 


       오늘 저녁은 매운야채호떡이었다. 늘 나오는 지하철 출구 앞에 호떡과 오뎅을 파는 곳이 있는데, 매번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 얼마 전 너무 배가 고파 호떡 하나를 사먹었다. 야채호떡이랑 씨앗호떡이 있었는데,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야채호떡을 시켰다. 아주머니가 옅은 쑥 빛깔의 밀가루 반죽을 능숙하게 뜯어내 야채 속을 넣고 커다란 철판 위에서 기름을 적당히 얹히고 누르개로 꾹꾹 눌러 맛나게 만들어주셨다. 호떡 안에 잡채랑 깻잎(!), 당근, 양배추가 들어있고 카레맛도 조금 난다. 남대문에서 먹은 튀긴 잡채호떡이랑 비슷한 맛인데 또 다르다. 우리 동네 호떡이 내 입맛에 좀더 맞았다. 온도도 딱 먹기 좋은 온도다. 남대문은 너무나 뜨거웠다. 오늘은 야근한 나에게 야채호떡 하나랑 오뎅 하나를 상으로 주었다. 호떡은 천원, 오뎅은 칠백원. 단돈 천칠백원에 행복해진 나. 내일은 불금이니 힘내잣. 


       이건 어젯밤 읽은 문장들. 역시 <사랑의 잔상들>에서. 92페이지에서 시작한다. "호세 루이스 게린의 자전적인 경험을 담은 영화 <실비아의 도시에서>(2007)가 떠오른다. 감독은 예술학교를 다닐 때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십수 년이 지난 어느 외국의 거리에서 발견하고 따라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따라간 것은 자신처럼 나이든 여성이 아니라, 사랑에 빠졌던 그때 그 나이의 여자아이였다." 94페이지에서 끝난다. 맛을 표현한 단어들이 가득한 우리말 사전이 있음 좋겠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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