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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서재를쌓다 2018. 10. 18. 22:59



       이번 책은 유럽기차여행 이야기라고 했다. 여름의 홋카이도를 보통열차를 타고 여행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읽었던 지라 이번 책도 기대했더랬다. 내게 오지은은 <익숙한 새벽 세시> 전과 후로 나뉘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새빨간 마릴린 먼로 원피스를 입고 널 보고 있으면 널 갈아 먹고 싶다고 노래하던 오지은이 전의 오지은이고, 완연한 봄을 앞에 두고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마주하는 오지은이 후의 오지은이다. 이 책도 후의 오지은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깊은 밤, 오지은은 우물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싫어 검색을 한다. 유럽, 베스트, 기차, 경치. 기차덕후 오지은은 비수기 겨울에 론리플래닛이 선정한 유럽 최고의 기차 풍경 베스트에 속하는 몇몇 구간들을 혼자 여행해 보기로 한다. 잘 쉬고 싶고, 신기해하고 싶고, 기차를 타고 알프스를 달리고 나폴리에서 피자를 먹고 싶고,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어서.


       종이가 꽤 두꺼운데, 전체적인 책은 얇다. 그래서 빨리 읽을 수 있다.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지만, 일부러 짧게 쓴 것 같다. 길게 쓸 수 있는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 것 같다. 겨울의 유럽. 나도 조용히 그녀의 여정을 따라 갔다. 핀란드에서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연어수프를 놓친다. 오스트리아에서 히틀러가 장기투숙한 호텔에서 달달한 아침을 먹고, 눈쌓인 거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일등석 기차에 앉아 입이 쩍 벌어지는 빙하들을 구경하고, 마테호른 봉우리가 보이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친퀘테레에서 수많은 터널들을 지나가고, 부은 편도로 병원에 가 하루종일 진료를 기다린다. 피렌체에서 근사한 극장을 찾아가 클래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대문열쇠를 부러뜨리고 만다. 나폴리에서는 해가 지면 쓸쓸해졌고, 외로울 땐 서점에 갔다. 얼떨결에 도서관에 가기도 했다. 소렌토의 미슐랭 맛집 인근 가게에서 엄청나게 맛없는 피자를 먹었고, 시칠리아로 가는 밤기차에서 근사한 시간을 보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고흐를 보았다.


       나는 오지은의 솔직함이 좋다. 무대 위에서도, 책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솔직했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말은 모두 다 진짜라고 믿을 수 있었다. 모두가 화려하고 만족스런 여행기를 뽐내는 시대이지만, 나는 이런 작고 솔직한 여행기에 마음이 간다. 나도 그러고 싶고.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은 역시 <익숙한 새벽 세 시>에서도 그랬지만 도입 부분. 프롤로그다. 프롤로그에서 오지은은 이렇게 말한다. "구석을 좋아한다. 카페에서도 밥집에서도 가능하면 가장 구석진 곳의 가장 구석자리에 앉는다. (...) 내 친구 J에게는 출구가 보이는 곳에 앉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상한 부분을 안고 살아간다. (...) 그런 사람이지만 여행을 좋아한다. 구석에 파묻혀 있는 걸 좋아하면서 또한 여행을 좋아하다니. 인생, 아이러니와 계속되는 싸움이다. 아름다운 것이 보고 싶다. 가능하면 구석자리에 앉아서. (...) 아마 나는 여행 내내 구석을 찾아다니고 네보난 방 안에 누워 천장만 보고 싶어하고 혼자 울적하다는 이유로 맛있는 것도 먹지 않고 낯선 곳에서 긴장하고 불안해하다 좋은 순간을 놓치겠지만 알면서도 또 짐을 싸고 여행을 떠나니 괴이한 일이다. 하지만 여행, 그래도 여행, 대체할 것이 없다."




      "넌 뭐에 대해 쓰고 있니. 여행을 왜 다니니."
      "나 언젠가부터 회색 대륙에 있는 것 같아. 즐거운 순간, 아름다은 순간은 잡을 수 없고 그냥 지나가.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어. 그래서 기차라도 실컷 타보려고 여기 왔어."
    그는 꿈꾸는 듯한 애잔한 표정을 잠시 보이고 이렇게 말했다.​
    "아, 나도 한때는 너처럼 생각했어. 허무했지. 하지만 봐봐. 아무것도 잡을 수 없어도 너와 내가 만나기 전과 후는 달라. 우리가 만나서 얘기하고 웃고 나눈 얘기들, 지금 이시간은 진짜야."
    순간에 복숭아가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분홍빛의 잘 익은, 달콤한 즙을 가득 머금은 복숭아. 먹고 나면 사라진다고 해도 내가 그 황홀한 맛의 시간을 지나온 것은 확실한 사실이니까.
    - 34쪽

      글래시어 익스프레스, 다른 이름으로 빙하특급, 별명은 세계에서 가장 느린 특급열차. 300킬로미터의 거리를 여덟 시간동안 달린다. 이렇게 느린 이유는 알프스를 오르기 때문이다. 해발 600미터 쿠어에서 2033미터 오버알프 패스까지 기차는 올라간다. 먼 옛날 빙하가 만든 흔적을 볼 수 있어 빙하특급이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알프스 깊은 골짜기 빙하의 흔적을 볼 수 있다니.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지나치게 탁월한 경험을 해버리면 다음이 없을 것 같아 두려워진다.
    - 51쪽

      라스페치아에 돌아오니 밸런타인데이라 모든 맛집이 전부 예약이 찼다. 간단히 누텔라 크레페를 먹고 젤라또를 먹었다. 목은 점점 부어올랐다. 잠시 차가운 것이 들어가니 좋았다. 입안이 달아 역의 맥도날드 겸 매점에서 커피를 샀더니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가 나왔다. 이탈리아가 이럴 수 있구나. 약국에서 산 편도용 사탕에서는 소독약 맛이 난다. 마음이 어둡다. 내일은 꿈꾸던 장소에 가자. 피렌체에 가는 게 소원이었던 사람처럼 피렌체에 가자. 카운터의 루카는 누가 복음의 루카답게 예쁘게 말했다. 지난주 날씨는 얼마나 별로였는지 몰라. 넌 얼마나 행운이니. 오늘 봄이 왔어. 넌 정말 운이 좋아.
    -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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