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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괜찮아지는 중입니다
    서재를쌓다 2018. 9. 3. 22:09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스웨덴은 어쩌다 겨울이 늦게 온다고 해도 좋아할 거 하나 없다. 언젠가 오게 되어 있다." 표지와 제목이 좋아서 찜해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독자평을 보고 주문해버렸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북유럽의 겨울을 상상하며 추운 날씨에 따뜻한 온기를 깔고 읽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만, 여름 이야기도 나오니 초록초록한 여름에 읽어도 좋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겨울성애자로써 첫 문장은 정말로 겨울에 읽었으면 더 좋을 뻔 했다. 작가는 스웨덴에 살고 있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전남편이랑은 이혼을 했고, 아이는 자폐 판정을 받았다.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남편과 이혼을 하고,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 힘을 얻고, 또다른 사랑이 찾아오고, 그 사랑을 또 떠나보내고. 이런 커다랗고도 소소한 일들이 제법 두툼한 책에 담겨 있다. 잘 정돈된, 담백한 일기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남의 일기를 보는 일이 참 좋구나 생각했다.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게 꽤 좋더라. 앞에 이혼을 하고 비로소 평온해진 마음이 나오는데, 뒤에는 이혼 전 지옥같은 마음이 나오고, 앞에 사랑하는 사람을 현실적인 이유로 떠나보낸 작가가 나오는데, 뒤에는 한창 사랑에 빠져 행복해하는 작가가 나온다. 그때그때 삶의 순간들이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작가는 가까운 사람을 그 사람의 특징으로 부르는데 전남편은 거북이, 아이는 선물이다. 그런데 또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S였다. 그리고 힘을 주는 친구들의 이름은 실제 이름 그대로이다. 이 각각의 호칭들도 의미있게 느껴지더라. 제목대로 작가는 힘든 고비들을 꿋꿋이 넘기면서 괜찮아지고 있었다. 요즘 에세이들을 연이어 읽고 있는데, 읽고 있으면 좋은 일기를 꾸준히 쓰고 싶어진다. 자칫하면 그냥 지나쳐 버릴 나의 소소한 기쁨과 슬픔도 잘 정돈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내 일기도 누군가에게 읽혀지면 좋겠다. 그 사람이 남의 일기를 보는 것이 좋구나 생각했음 좋겠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제각각 나름의 사정으로 잘들 살아가고 있구나 느껴진다. 그 일들을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진다. 에세이가 참 좋구나, 느끼는 요즈음이다.   




       타인에게 솔직하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이렇다고 믿었던 것들은 곧잘 틀린다. 위기에 놓였을 때 '내가 생각했던 나'의 반응과 그 순간 내 진짜 반응은 종종 전혀 달랐다. 어쩌면 인생이란 나 자신에 대한 발견일지도 모른다. 먼지의 무게마저 버겁던 때 깨달았다. 공부나 일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는 걸.

    - 8쪽


       그리고 물었다. 

       '지금 당신의 상황이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무엇 하나를 바꿀 수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요?'

       나도 모르게 진심이 나왔다. 

       '다른 한 사람의 어른에게 진정한 가까움을 느껴보고 싶어요.'

    - 40-41쪽


       페이스북에서는 모두가 행복해 보여도 사람들은 별 볼일 없이 산다느니, 스웨덴 가구 중 부부관계 없이 사는 부부가 몇 퍼센트라니 하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누구네 집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위안 아닌 위안을 받았다. '다들 이렇게 살아, 다 가질 순 없어.' 그런 생각으로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았고 나 자신을 돌보지도 않았다. 

    - 69-70쪽


       지난번에 저녁을 먹을 때 누군가에게 실망한 이야기를 했더니 울로프가 말했다. '세상에는 말로만 하는 사람들이 있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말로만 하는 사람인 게 느껴지면 끊으면 돼.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들만 간직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간단한 거야.'

       울로프와 에밀리는 내게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좋은 관계란 정말 이만큼 간단하다. 그 마음이 제일 근본적이고 중요하다. 

    - 74쪽


       그는 나와는 달리 하나하나 말로 설명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외국어여서인지 그 사람의 성격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언어는 늘 간단하다. 화려한 수사, 긴 문장은 없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그가 내게 하는 감정 표현의 전부다. 그렇지만 그의 단순한 문장들에는 늘 어떤 힘이 있다. 

    - 79쪽


       사랑이 버스처럼 지나가면 또 온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다. 이 사람이 가면 언제 또 이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이 사람을 만나고서 여러 가지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스톡홀름에 출장 일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내게 언제 다녀오느냐고 물었다. 혹시 금요일이 끼어 있으면 그때 스톡홀름에서 만나자도 하려는 걸까 궁금해 물었다. '아,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내가 물어본 건 당신이 스톡홀름에서 돌아오는 날 저녁을 지으려는 거예요. 저녁을 만들어줄게요.' 지금까지 누구도 내게 이렇게 해준 적이 없었기에 놀라고도 기뻐하자 그는 오히려 조금 당황했다. '이거 별거 아니에요. 당신은 늘 내게 이렇게 해주잖아요.'

       S는 나를 늘 보고 있었다. 내가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배려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돌려주려고 했다. 이런 마음이, 이런 사람이 얼마나 특별한지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다 들여서 깨달았다. 

    - 94-95쪽


       영화로도 나왔던 소설 <디 아워스>에서 클라리사는 아름다웠던 어느 날을 회상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그때 아 이게 행복의 시작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시작이 아니었어. 행복이었어. 순간이었다고."

       나는 지금 그 순간에 있다. 행복하다.

    - 102쪽


       나의 아름다운 주말이자 평안한 평일 저녁이었던 사람이 정말 간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지만 이미 했던 말의 변주곡일 뿐이다. 내가 이전에 한 말을 더 그럴듯하게 한다고 해서 그가 지금 모르고 있는 걸 깨닫게 되는 건 아니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말한다. 사랑해, 행복해.

    - 107쪽


        꿈속에서 느낀다. 행복할 수 있다.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사랑 받을 수 있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주문처럼 외운다. 

    - 238쪽


       아그네스가 말하는 선배 언니는 내가 아는 그 모습이다. 아그네스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아그네스는 아마도 나랑 언니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오늘 더 행복했을 것이다. 오늘 다시 깨달은 거. 잘 살자. 언제 어느 때 나를 아는 누가 다른 나를 아는 누구를 만나 좋은 기억으로 이야기하며 행복해할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의 기억이 되고 싶다. 

    - 241쪽


       두 번째 별똥별을 기다리면서 소설가 새라 워터스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40대에 슬픔을 만나게 된다. 마흔 전에는 새로운 것들과 조우하지만 마흔 후부터는 그것들과 이별한다." 그런데 아직 새로운 경험이 나를 찾아온다. 새로움이 지나가고 나서도 이 경험은 경이로울 것이다. 

    - 247쪽


      이렇게 아프다니. 이렇게 나이가 들어도 감정은 늘 파도처럼 새롭구나. 왜 무뎌지지 않는 건지. 왜 담담하지 않은 건지. 담담함이란 나이를 먹어도 얻지 못하는 지혜처럼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다.

       이 그리움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직하고 싶다. 지우고 싶지 않다. 나에게 물어본다. 누군가를 이렇게 그리워한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의 허상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그 기쁨을 그리워한 적이 있던가? 그만큼 행복해서 그만큼 그립다. 누군가를 이토록 온전히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안다. 

    -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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