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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휴, 첫째날
    모퉁이다방 2016. 5. 9. 00:18



       우리는 충무로의 어느 술집에 있었다. 1층이었고, 테라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이것만 마시고 일어서기로 했다. 나는 생맥주를, 친구는 잭콕을 시켰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고 되어 있었던 비였다. 우리 테이블 뒤로 조금 어려보이는 남여 커플이 들어와 앉았다. 술집이 조용해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두 사람은 조곤조곤 높임말을 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는 오고, 음악도 좋고, 두 사람의 높임말 소리도 좋은 거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친구에게 높임말을 쓰며 단둘이 술을 마실 수 있는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 두 사람의 소리가 참 예쁘게 들린다면서.


       친구랑 헤어지는데, H씨에게 메시지가 왔다. '맥친, 오랜만이죠. 저 금령씨 동네 와서 술 마셔요. 그러다 생각나서.' 나는 충무로에서 연신내역까지 3호선을 타고, 연신내역에서 새절역까지 6호선을 타고 H씨에게 갔다. H씨는 남편과 그의 친구와 방금 전까지 다트를 했다고 했다. 우리는 해산물을 파는 가게로 이동했다. H씨와 나는 맥주를, H씨의 남편 S씨와 S씨의 고등학교 친구는 소주를 마셨다. 안주는 산낙지를 시켰다. S씨는 멍게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랑 H씨와 S씨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데, 이렇게 개인적으로 셋이 술을 마신 것은 두번째였다. S씨는 원래 응암 사람이고, 부모님의 가게가 응암에 있다. H씨는 이마트를 지나갈 때마다 S씨가 여기가 금령씨네 집인데, 라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S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취했고, H씨가 남편을 깨운다고 데리고 나갔다. S씨의 친구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주로 이런 이야기였다. 많이 마시신 거 같은데, 안 취한 거 같애요. 저 취했는 데요. 전혀 안 취해보여요. 내가 앉은 자리로 가게 문이 보였는데, 그 뒤로 S씨가 빼콤 얼굴을 내밀더니 다시 사라졌다. 그러다 몇 분 뒤에 다시 얼굴을 내밀더니 또 금방 사라졌다. 나는 이게 두 사람의 사려깊은 소개팅 자리인가 생각했다. 자리로 돌아온 S씨는 내게, 그런데 금령씨는 왜 연애를 안해요? 하고 물었다.

       H씨와 S씨는 대리를 불렀다. 우리는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골랐다. 나는 간만에 만났는데 일찍 헤어져서 아쉽다고 말했고, H씨도 그러니까요, 라고 맞장구를 쳤다. H씨는 내가 아는 한, 취한 적이 없다. S씨는 오늘 빨리 취했다. 얼마 전 회식 때도 S씨가 많이 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생각했다. S씨는 힘이 든걸까. S씨는 친구에게 나를 꼭 데려다주라는 말을 남기고 차문을 닫았다.

       S씨의 친구와 나는 밤길을 걸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었다. S씨의 친구는 키가 컸다. 길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S씨가 커피 이야기를 꺼냈다. 비는 잠시 그쳐 있었다. 비가 오면 커피가 더 맛있죠, 이런 이야기를 했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커피집을 가리켰다. 여기 커피 맛있는데. 집에서 상암까지 걸어서 종종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니, 걸어서요? 라면서 눈을 번쩍 떴다. 네, 걸어서요. 자전거 타고 가지 않고요? 저, 자전거 잘 못 타요. 그냥 탈 줄만 알아요. 걸어서 가면 좋아요. 얼마 걸리지 않아요. 나는 집 근처에서 물었다. 여자친구 없어요? S씨의 친구는 없어요, 라고 하더니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라고 말했다. 집 앞 길까지 왔다. 이제 가셔도 된다고 했다. 담배 한 대만 피고 갈게요. 내게 담배를 피냐고 물었고, 내가 피지 않는다고 하니까,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럼 그냥 갈게요, 하면서 택시를 잡았다. S씨의 친구집은 우리집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다섯 정거장 정도다. 그렇게 S씨의 친구와 헤어졌다.

       나는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 복층에 올라가 누웠다. 이불을 덮고는 생각했다. 아, 높임말을 쓰는 남자랑 단둘이서 밤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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