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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 위드 러브와 냉장고 메모
    극장에가다 2013. 5. 4. 12:11

     

     

     

        지난 주말에 결혼식이 있었다. Y씨와 나는 합정에서 만나 2호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역까지 갔다. Y씨는 간만에 신은 굽 있는 구두와 귀걸이가 어색하다고 말했고, 나는 너무 화려한 목걸이를 했다며 쭈빗거리며 자켓 안을 보여줬다. 우리는 11시에 간신히 도착해 축의금을 내고 식을 보고 밥을 먹었다. 뷔페였는데, 맛이 꽤 괜찮았지만 전날 과음을 한 탓에 얼마 먹지 못했다. 과장님이 맥주를 계속 권했는데 속이 우글거려 그림의 떡이었다. 해물과 야채를 데쳐낸 샤브샤브의 짠 국물만 다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데 팀장님이 남자친구는 없느냐고,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댔다. 나는 그냥 웃을 뿐.

     

        다같이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그래도 나름 꾸미고 아침 일찍 나왔는데,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 광화문으로 갔다. 마침 보고 싶었던 영화 상영시간이랑 맞았다. 씨네큐브는 갈 때마다 장노년층의 관객들이 많다. 신기하다. 나도 늙어서도 자주 극장에 다녀야지 생각했다. 광화문 역에서 내려 씨네큐브까지 걸어가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날이 무척 좋았거든. 꽃은 대부분 졌지만 나뭇잎들 색깔이 환상적이었다. 싱싱한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연두빛. 햇살도 좋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주고. 그야말로 봄.

     

        <로마 위드 러브>는 그냥 그랬다. 기대했던 것만큼 좋진 않았다. 티비에서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에서 샤워신을 미리 봐버려서 그 장면이 그렇게 웃기지도 않고. 그래도 좋았다. 하루 중 날이 제일 좋은 오후 시간에 어두컴컴한 극장 속에 들어와 있는데, 방금 걸어왔던 그 길을 계속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로마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이어지고, 영화 속 날씨도 쾌청했다. 아름답게 찍힌 유적지와 맛있게 취해가는 사람들, '우디 알렌 영화랍니다' 라고 광고하는 쉴 새 없는 대화들. 좋았던 에피소드는 알렉 볼드윈이 로마에서 자신의 과거를 여행하는 이야기. 어느새 늙은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속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작업을 거는 여자친구의 절친에게 저게 다 쇼다, 나쁜 년이다, 투덜투덜거리지만 그곳엔 목주름도 없고, 날씬한 몸매에, 갑자기 찾아온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는 젊은 자신이 있다. 그리고 나, 제시 아이젠버그에게 완전 빠졌다. 하트뽕뽕. 제시 아이젠버스, 카세 료, 신재평. 이 셋의 느낌이 왠지 닮았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갑자기 담백한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졌다. 영화 속에는 그런 스파게티가 안 나왔는데, 이상하게 땡겼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광화문에서 처음 탔다. 버스 안에서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내 결혼식에는 누군가가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왔던 '달빛산책'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네이버 검색창에 '달빛산책'이라고 검색하니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있었다. 창덕궁을 야간에 산책하는 프로그램인데, 해설해주는 사람도 따로 있다. 진작에 알았으면 신청했을텐데. 보니까 예매 시작하자마자 매진이 되는 인기 프로그램이란다. 하반기에도 있다니 잘 기억해뒀다 가을고궁 달빛산책에 도전해봐야지.

     

        마트에 들러 스파게티 면이랑 할인해서 파는 삼치를 제일 싼 걸로 샀다. 팬을 달구고, 올리브 오일을 둘렀다. 마늘을 칼로 무심하게 다져서 넣으니 지지직하고 맛있는 소리가 순식간에 난다. 미리 익혀둔 삼치 살을 손으로 찢어 넣고, 삶은 스파게티 면을 넣었다. 시들기 직전의 냉장고 안 쑥을 잘게 다져서 완성된 스파게티 위에 뿌렸다. 위층에서 자고 있던 막내동생이 냄새를 맡고 일어나 내려왔다.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동생이 정말 맛있다고 했다.

     

        어제는 회사에서 아빠가 보낸 등기를 받았는데, 사실 엄마가 보낸 거였는데 아빠가 대신 부쳐줬다. 봉투를 건네받자마자 얼마 만에 보는 아빠 글씨인지 나도 모르게 뭉클했다. 아빠는 글씨체가 특이한데, 어떤 글씨들은 잘 못 알아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사하다. 아빠와 비슷한 글씨체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 멋진 글씨체인 것 같다. 송알송알, 이라고 쓴 거 같은데 맞는지 모르겠다. 좋은 일들이 송알송알. 그리고 일을 하다 옆 사람 모르게 눈물을 훔쳐냈는데, 그 다음 문장 때문이었다. '다음에 또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사먹고 싶다.' 어제 Y씨랑 야근을 하고 합정에서 삼겹살에 항정살을 구워 먹으면서 저 문장에 대해 말했는데, 저 문장을 말하자마자 순식간에 내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빨간색 앞치마를 매고 내 얘길 가만히 듣고 있던 Y씨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살짝 고여 당황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Y씨는 화장실을 가고 싶어 맥주를 더 못 마시겠다고 했고, 내가 병에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 일어났다. 지난 겨울 둘이 함께 산 친환경 가습기가 있는데, 화분형 케이스에 특수제작한 가습기 리필을 꽂아놓는 거다. 이번 주말에 새로운 리필을 주문하기로 했다. Y씨는 초록색, 나는 파란색으로. 월요일에는 지난 주말 결혼한 동료가 사무실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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