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포르투갈, 리스본, 두번째 밤
    여행을가다 2015. 8. 14. 08:59

     

     

     

     

     

     

     

     

     

     

     

     

     

     

     

        헤르미온느가 있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도, 발견기념비에서도 헤르미온느가 있었다. 헤르미온느는 아빠랑 엄마랑 오빠랑 여행 중이었다. 중학생 즈음 되어 보였는데 이쁘고 발랄했다. 아빠가 카메라를 내밀면 자동으로 귀여운 포즈를 착착- 취하면서 상큼하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헤르미온느에게 눈이 갔다. 아, 어리구나, 이쁘다. 너의 젊음이 진정 부럽다! 그 헤르미온느가 15E 트램에서 폭발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정류장에서 출발한 트램이 중간에 한번 멈췄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에어컨 바람은 솜털같이 가벼웠다. 기사가 트램을 점검하는 듯 했다. 곧 다시 출발했다. 그러더니 또 멈췄다. 그렇게 총 세 번을 멈췄다. 그동안 트램은 찜통 같이 달아 올랐고, 에어컨은 아예 나오질 않았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소리 내서 항의하기도 했다. 당장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아, 여행기에서 본 장면은 이게 아니었는데. 리스본의 트램은 오래 되어서 자주 멈춘다 했고, 그러면 사람들이 항의할 것도 같은데, 아무도 항의하지 않고, 고쳐질 때까지 평온하게 기다린다고 했다. 그게 놀라웠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트램 안이 너무 더웠다. 7월의 리스본은 정말이지 너무 더웠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까지는 바람이 선선한데, 일단 해가 뜨면 내가 서서히 타들어 가고 있구나,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더위에, 꽉 막힌 트램 안에서 헤르미온느가 격한 목소리로 창가 사람에게 제발 부탁인데 창문 좀 열어 달라고 했다. 창가 사람이 창문을 열어주니 귀엽고 과도한 리액션으로 이제야 살 것 같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저러는 것도 귀엽네. 트램이 두 번째 멈췄을 때, 빨갛게 달아익은 얼굴로 내렸다. 안녕, 헤르미온느.

     

        나도 버티고 버티다 결국 트램이 세번째 멈췄을 때 내렸다. 트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가까운 정류장으로 줄지어 걸어 갔다. 버스가 오면 우르르 탔다. 나도 버스의 노선을 확인하고 탔는데, 멍하게 있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 흑. 버스에도 안내 방송이 안 나오더라. 원래 도둑시장을 가려고 했는데. 15E 트램을 탔으면 제대로 찾아갈 자신이 있었는데. 그냥 결심해 버렸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고, 도둑시장은 가지 말자고. 이 더위에 또 어딘가를 궁리하며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이드북이나 지도를 펼쳐 볼 기운도 없었다. 나에게 남는 건 시간 뿐이니, 그냥 발길이 가는 대로 걸어보자. 걷다보니 조각상이 보였다. 광장도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말도 안 된다, 아침에 산책한 코메르시우 광장이 나왔다. 이제야 리스본의 지도가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아, 이제 확실히 알겠다. 

     

       너무 목이 말랐다. 코메르시우 광장에 맥주박물관이 있었다. 아침 산책길에 발견하고 가봐야지 생각했었다. 들어가 보니 생맥주 종류가 라이트, 블랙, 레드 세 가지가 있었다. 고민하고 있으니, 조금씩 시음을 시켜줬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레드로 결정. 350ml 맥주를 바 자리에 앉아 아껴 마셨다. 맥주잔 모양이 특이했는데, 거꾸로 된 맥주병 모양이었다. 박물관 앞에서 맥주잔도 판매하고 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엽서를 썼다. 그래, 도둑시장 따위.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숙소는 가까웠으므로, 그리고 나는 더위에 너무 지쳤으므로, 숙소에 들어가서 잠시 쉬고 나오자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와이파이로 친구와 수다를 좀 떨다가 잠시 누웠다. 6시인데도 해가 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대낮같이 밝았다. 조금만 잤다가 검색해 둔 식당에 가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면 되겠다 생각했다. 역시 해물이 좋겠지. 정어리나 해물밥을 먹자. 와인도 마시자. 아니다, 맥주를 마실까. 일단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까, 조금만 쉬자. 조금만 자다 나가자, 했다. 중간중간 깼는데 하늘이 계속 파랬다. 아직도 해가 안 졌네, 확인하고 잠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났는데 해가 져 있었다. 그리고 11시가 되어 있었다. (다음날 안 사실인데 7월의 포르투갈은 10시 즈음에 해가 졌다) 헉. 어쩌지. 11시라니. 망했다. 혼자 오니 깨어줄 사람도 없구나. 알람이라도 맞추고 잘 걸.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이라도 나가볼까. 그런데 여긴 낯선 곳이고, 곧 있으면 자정이고, 테라스에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뭔가 노는 듯 보이는 동생들이 떼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아, 배는 고픈데, 잠도 완전히 깼는데. 시차, 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실감했다. 테라스에 나가 밤 풍경을 계속 내다보다가 조식을 생각하며 잠을 자보려 했는데 방금 숙면을 취한 탓에 잠이 잘 오질 않았다. 둘째 밤, 내가 몇 시간을 잤더라. 책도 조금 보고, 동생들이랑 얘기도 좀 하고, 일기도 쓰고, 다시 테라스로 나가 밤 풍경을 내다보고 그러다 잠이 설핏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조식 시간이 되기 전에 깨끗히 씻고 꽃단장을 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아, 너무 배고팠기도 했지만, 정말 빵맛이 꿀맛 같았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