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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후르츠극장에가다 2018. 12. 7. 14:16
제주에서 귤을 보내줬다. 유기농 귤이라 빨리 먹어야 한다는 메모가 있었다. 며칠 두었더니 상자 아래에 터지기 시작하는 귤들이 있어 어쩌지 하다 귤잼을 만들었다. 히라마쓰 요코의 조언대로 밤에 잼을 만들기 시작했다. 터지고 무른 귤들을 골라내 껍질을 벗겨내고 한 알 한 알 떼어냈다. 인터넷의 레시피대로 믹서에 돌리지 않고 나무주걱으로 꾹꾹 눌러 과육이 나오게 터트렸다. 그렇게 끓이고, 설탕과 꿀을 넣고, 가끔 주걱을 휘저으면서 생애 첫 귤잼을 완성했다. 집안 가득 달달한 냄새가 가득했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먹기 좋게 식어있었다. 사놓은 식빵이 없어 요거트에 넣어 먹었다. 레시피는 를 그대로 따랐다. "중요한 것은 왁스를 칠하지 않은 제철 과일을 사용하는 것. 산에 강한 냄비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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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서재를쌓다 2018. 12. 5. 22:55
퇴근 길이었나. 약속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나. 몇 주 전이었고, 합정역이었다. 망원방향의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나서 모두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여자분과 남자분이 있었다. 아주머니, 아저씨 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여자분이 어찌보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남자분의 가슴과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끊겼다 들렸다 끊겼다 했다. 주위를 의식한 게 아니라 너무 서러워 소리가 끊기는 거였다. 그 순간 남자분의 표정과 소리를 보고 듣지 않았더라면 그냥 여자분이 만취 상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울부짖는 여자분을 부축하는 남자의 얼굴에 울음이 섞인 절망이 보였다. 그런 절망의 표정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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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리극장에가다 2018. 12. 5. 12:24
휴가 첫날. 늦어서 택시를 탔다. 커다란 횡단보도를 건넌 뒤 모범택시 바로 뒤에 오는 개인택시를 잡았다. 자켓 차림에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넘긴 기사님이었다. 목적지를 말했다. 택시 안은 라디오 소리만 들리고 조용했다. 우회전을 했다. 기사님이 입을 여셨는데, 실은 계속 직진을 할 줄 알았다고 했다.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던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택시를 잡길래 직진손님인 줄 알았다고. 뭔가 정중하게 이야기 하셔서 나도 모르게 죄송해요, 라고 말했다. 기사님이 아니예요, 라며 영화 보시러 가시나봐요, 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틀어놓은 티비로 예능 프로그램이 나왔고, 한때 이 예능에 출연했던 정치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지금도 그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라고 반문하니, 있지요,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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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모퉁이다방 2018. 12. 4. 22:19
G가 H에게 물었다. 왜 결혼이 하고 싶지 않았어? H는 평생 연애만 할 수 있으면 그러고 싶었다고 했다. 연애는 둘의 관계만 생각하면 되지만, 결혼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나의 가족과 상대방의 가족, 그 속의 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G는 그렇지, 라고 대꾸했다. 몇달 전만 해도 그런 현실적인 말들이 서운했는데, 이제는 그 말들을 여러번 곱씹어본다. H의 그 말을 곱씹고 곱씹고 곱씹어 보니 G도 그랬다. G에게도 어려운 일이고, 낭만적이지만 않은 일, 현실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정말 '그렇지' 였다. H는 한참 뒤에 말했다. 그런데 너랑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H의 동네에 맛있는 돼지갈비집과 정말 맛있는 마른오징어를 파는 슈퍼가 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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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모퉁이다방 2018. 11. 27. 22:28
지난 주에는 두 명의 친구를 만났다. 한 친구는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다. 대전 쪽에서 지내던 친구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가족은 세종시에 있고, 자기만 이직을 해서 서울에 올라와 있다고, 같이 있다 혼자 있으려니 외로운 느낌이 든다고, 언제 한 번 얼굴 보자고. 우리는 반 년 전에 만났던 사람처럼 퇴근 후 합정역에서 만나 곱창을 먹으러 갔다. 실은 그애가 결혼한 뒤 한참 만에 만난 거면서. 애가 벌써 둘이니까. 옛날 얘기를 하면서, 예전 친구들 얘기를 나누면서, 곱창을 먹었다. 2차를 가서는 먹태와 라면땅도 먹었다. 친구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중학교 때 왜 그렇게 니네들이랑 대면대면 하게 지냈을까. 그때 친하게 지냈으면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을 거 같은데.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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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카레모퉁이다방 2018. 11. 20. 20:39
간만에 보경이와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샤브샤브집에서 만났다. 이를테면 우리의 단골집인데, 샤브샤브집에 간 것도 오랜만이었고, 우리가 만난 것도 오랜만이었다. 내가 오픈시간을 알아보지도 않고 약속시간을 정해서 근처 커피집에서 샤브샤브집 문이 열 때까지 기다렸다. 보경이가 종이가방을 건넸는데, 거기에 태국에서 사온 선물들이 있었다. 어유 언니 말도 마, 로 시작하는 보경이네 부부 태국 여행담에는 이보다 틀어질 수가 없다, 싶을 만큼 여러 일들이 있었다. 공항에서 픽업 택시를 예약해뒀는데, 날짜를 잘못 예약해서 택시는 전날 이미 왔다 갔고, 좋은 마사지숍을 예약해뒀는데, 예약변경요청 메일이 왔지만 받지를 못 해 이미 취소되어 있었고 등등.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은 여행담을 듣는데, 나는 들으면서 고생했겠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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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시간들극장에가다 2018. 11. 17. 08:12
올해 건강검진은 늦었다. 접수 데스크에 가니 늦게 오셨네요, 했다. 오전 시간에만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다음날 Y씨에게 물어보니 7시까지였단다. 9시 넘어 도착했으니 확실히 늦었네. 하지만 느즈막히 끝난 덕분에 근처 골목길에서 생선구이 정식을 점심으로 먹고, 아빠와 간만에 통화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이수역으로 가 이 영화를 봤다. . 어느 영화의 예고편에서 보았는데, 아파트가 커다란 나무에 둘러쌓여 있는 풍경이었다. 여름이었고, 초록색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파트를 감싸고 있는 나뭇잎들이 일제히 쏴아-하고 움직이니 마치 그 아파트 자체가 살아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그 예고편을 보고, 개봉하면 꼭 봐야지 하고 개봉일도 알아뒀는데, 개봉관이 많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더랬다. 시간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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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여행을가다 2018. 11. 10. 06:51
항상 싸움은 내 쪽에서 시작한다.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입장은 또 다를 것이다. 어쨌든 시작은 항상 나다. 우리는 강릉에 오후 느즈막히 도착했다. 강릉까지 가는 동안, 주문진으로 가는 길과 같아서 지난 겨울 추억에 빠졌더랬다. 고속도로 거의 마지막에 주문진으로 가는 길과 강릉으로 가는 길이 달라졌다. 숙소는 촌스러운 감이 있지만, 사람들의 평대로 가격대비 좋았다. 깔끔했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근사했다. 경포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뭘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숙소를 나갔는데,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던 차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마구마구 쏟아졌다. 장마비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좋은 걸 먹자며 계속 걸어갔는데, 비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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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이즈 본극장에가다 2018. 11. 8. 22:43
은 좋았다.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봤는데, 보다가 꽤 울었다. 영화를 보고 평을 보니, 이야기가 구식이고 뻔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나는 잘 모르겠더라. 왜냐면 나는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줄곧 여자가 남자를 냉정하게 차버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레이디 가가는 육고기 드레스 정도 밖에 모르고 사실 얼굴도 몰랐는데, 연기가 좋더라. 배우로도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후반부에 레이디 가가, 아니 앨리가 부르는 노래들은 별로였다. 제일 마지막에 장엄한 오케스트라 군단과 함께 불렀던 슬픔의 노래도 그냥 그랬다. 소소하고, 담담하게 불렀으면 좋았을 걸 생각했다. 브래들리 쿠퍼, 아니 잭슨과 함께 투어를 하며 밴드와 혹은 혼자 연주를 하며 부르는 노래들이 좋았다. 그게 진짜 앨리의 노래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