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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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서재를쌓다 2021. 10. 26. 21:57
아이가 백일이 되기 전이었다. 몸과 마음이 한창 지쳐있던 때. 조금 외로웠던 밤이었는데 완전히 혼자 있고 싶어 반신욕을 했다. 그 즈음 매일 밤 반신욕이 간절했다. 최은영 작가의 은 봄이가 선정한 시옷의 책이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읽으려고 사두었었다. 책을 가지고 들어가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오래 있었다. 두번째 챕터 마지막 문장을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증조모는 열일곱일 때 살기 위해 엄마를 버려야 했다.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이 분명한 엄마를 자신이 살기 위해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간다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증조모의 딸, 그러니까 주인공의 할머니는 병에 걸린 자신의 엄마 증조모가 자신을 보며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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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모퉁이다방 2021. 10. 13. 12:13
어제는 아이가 계속 짜증을 부리며 울길래 산책을 나갔다. 하늘도 흐리고 바람도 쌀쌀해 산책은 생략하려고 했는데 부랴부랴 챙겨 나갔다. 긴팔 바디수트에 이번에 산 민트색 레깅스를 입혔다. 양말도 신기고 모자도 씌웠다. 혹시 유모차에서 울까봐 노란색 튤립 사운드북도 챙겼다. 튤립 사운드북이 여러 개 있는데 노란색 노래들이 경괘해서 그런지 유독 이 튤립을 좋아한다. 나가보니 맞은편 동네 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어둑어둑한 것이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우리 동네 구름은 많기는 하지만 색이 괜찮아서 근처만 조금만 걷다 오자며 나섰다. 그리고 근사한 구름을 만났다. 유모차를 멈추고 말했다. 지안아, 진-짜 예쁜 노을이다. 그치? 다행이다. 집에만 있었으면 저 예쁜 노을을 못 봤을텐데. 보고 있는건지 그냥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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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희망티비를보다 2021. 10. 8. 16:3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틀에 걸쳐 봤다.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티비를 켜지 않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고 있는 사이 틀었다가 깨어나도 끄질 못했다. (미안, 아가) 3살이 되어가는 딸이 있는 알렉스가 함께 사는 남자친구에게 학대를 당하고 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라고 쓰고 사전에서 '고군분투'를 찾아봤다. 고군분투 : 적은 인원(人員)이나 약한 힘으로 남의 힘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극악스럽게 함. '극악스럽다'도 찾아봤다. 극악스럽다 : 더할 나위 없이 못되고 나쁜 구석이 있다. 극악스럽다는 표현을 제외하면 맞는 것 같다. 탈출은 단순히 도망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의 완벽한 독립이다. 알렉스는 한 번의 실수를 하지만 결국 해낸다. 그녀에게는 어릴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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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시간모퉁이다방 2021. 10. 5. 23:32
아이가 다시 세네 시간마다 깬다. 이건 신생아 즈음에나 있었던 일인데 (그래봤자 이제 겨우 사개월차) 아홉시나 열시 부근에 자니까 세네 시간마다 깨면 새벽에 두 번을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다. 아이를 재우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다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자정이 되기 전에 침대에 눕는데 잠든지 한 시간도 안돼 아이가 울기 시작하는 거다. 나는 아침잠 없는 사람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었다(과거형). SBS 아침뉴스 1부 시작할 즈음에 자동기상하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3부 끝날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다. 며칠 전 새벽에는 아이가 너무 심하게 울어 둘다 깨어있었다. 수유를 시작했고 남편은 이렇게는 안되겠다며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 끝에 찾은 것은 어떤 해결책이 아니라 4개월차 아이들의 원더윅스였다. 그 밤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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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에 진심입니다서재를쌓다 2021. 10. 3. 00:41
구도심 주택에 살아보니 집을 '산' 것은 동네를 '사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집은 삶 그 자체이고 내 집이 위치한 동네는 브랜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관계망이다. 구도심 작은 동네의 좁은 관계망이 어떨 땐 불편하기도 하고 어떨 땐 즐겁기도 하다. 불행히도 아파트에 살 때 내게 이웃은 얼굴 없는 층간소음의 장본인일 뿐이었다. 혹여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고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같은 공간을 사는 이웃이 되었다. 집 앞에 낙엽이 뒹굴면 낙엽을 쓸고 눈이 오면 눈을 같이 치워야 한다. 좋건 싫건 나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며, 우리 가족만 잘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자연스레 깨닫는다. - 10쪽 단독주택은 남편의 소망이 되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만이 쇄도하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