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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정한 구원
    모퉁이다방 2019. 7. 3. 23:16

     

     

      요즘은 평일 저녁에 꼬박꼬박 헬스장엘 간다. 약속 있는 날과 의욕이 없는 날을 제외하고. 후자의 날들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살이 빠져야 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간다. 가서 핸드폰을 보면서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걷더라도 가긴 간다. 요일별로 헬스장에 오는 사람들 수가 차이 나는데, 확실한 건 금요일에는 좀 절박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나를 포함해서. 갈 때 꼭 이어폰을 챙긴다. 8시 즈음에 시작하는 뉴스를 보고 나오면 딱 좋다. 어떤 우울한 날에는 너무나 괴로운 뉴스들이 많아 이 세상은 왜 이모양인가 하며 절망하지만, 대부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빨리 40분이 지나길 바라면서. 이번주에 가지고 다니는 이어폰이 고장이 났다. 헬스장에는 동그란 단자로 된 이어폰만 연결이 가능한데, 그게 집에 딱 하나 남아 있었다. 그제는 자막이 나오는 티브이를 봤고, 어제는 그냥 화면만 보며 걸었다. 오늘은 어떻게 이 지루한 시간을 견딜까 고민하다 얼마 전에 동생이 공유한 전자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생애 첫 이북이다. 

     

      몇 년 전에 갑자기 발 뼈가 부러져 포르투갈에 가지 못한 동생은 포르투갈에 대한 온갖 연정이 있다. 이 책도 리스본 이야기라고 해서 구입했단다. 하루 만에 다 읽었고, 기어코 포르투갈에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그리고 내게도 권했다. 언니가 읽으면 혼자 갔던 그 시간들이 떠오를 것 같아. 오늘 8시 넘어 헬스장에 가서 회원증을 내고 수건과 락커키를 받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러닝머신 위에 섰다. 티브이를 켜지 않고 이어폰도 끼지 않고 핸드폰의 이북 앱을 열었다. 핸드폰을 가로로 누이고, 러닝머신 시작 버튼. 손가락을 스윽 움직이니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렇게 응암동 헬스장 한 켠을 걷고 있는 내 앞에 몇 년 전 리스본 풍경이 펼쳐졌다. 한밤에 도착했던 공항, 잔뜩 긴장하며 탔던 택시, 그 안을 가득 메우던 라디오 소리, 트램의 시작점에 있었던 혼자 자기 아까웠던 숙소, 첫날 교통카드 사기 전 실렁실렁 걷다 만난 코메르시우 광장, 이어폰을 끼고 혼자 행복하게 앉아 있는 한국 사람을 보았던 테주강, 소매치기가 많다고 해서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28번 트램 나무소리, 소매치기를 만나 소심해져 결국 가지 못했던 상 조르즈 성까지. 몇 년 전의 일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행 직후에도 깨달았지만, 그 경험들이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 코메르시우 광장을 가로질러 테주강 변에 다다르니 물가에 얕은 계단이 나 있다. 강물이 철썽이는 잔잔한 소리가 들리고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수평선뿐이다. 눈부신 햇살은 따뜻하고, 강물과 바람은 기분 좋게 차다. 사람들은 강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사진을 찍는다.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고 낯선 사람에게 웃으며 부탁한다. - 임경선 <다정한 구원>

       

      동생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다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건 정말 '다정한 구원'이라고. 천천히 읽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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