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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 밤, 걷기
    서재를쌓다 2013. 8. 25. 18:27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마음의숲

     

     

        요즘 걷고 있다. 조금 열심히 걷고 있다. 퇴근을 하고 간단한 복장으로 갈아 입은 후 운동화를 신고 불광천으로 나간다. 나이키 러닝 어플을 켜놓고 빠른 걸음으로 두 팔을 흔들며 걷는다. 어떤 날은 1시간 정도 걷고, 어떤 날은 1시간 반 정도 걷는다. 그 시간에 불광천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걷고, 뛰는 사람들. 누군가를 앞질러 가기도 하고, 누군가의 땀냄새를 스쳐가기도 하면서 걷는다. 오늘은 걷지 말까 이래저래 고민하는데, 일단 걷기 시작하면 즐거운 마음이 든다. 한 달 반 정도 되어가는데, 걷는 동안 이 책을 읽었다. 출간했을 당시 사두었다가 이제야 꺼내 읽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어떤 문장 때문이었다. 신촌에서 새로운 수업을 듣기 시작한 친구가 첫 날 받은 프린트물을 내게 줬다. 어떤 기사를 프린트 한 거였는데, 거기에 이 책 속의 어떤 문장이 있었다. 그 문장이 있는 완전한 글을 읽고 싶어 책을 꺼냈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읽어 나갔다.

     

        이 책에는 내내 뛰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라톤을 여러 번 완주한 작가가 매일 뛰면서 느끼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 나는 겨우 빠르게 걷고 있지만 공감되는 부분이 제법 있었다. 뛰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감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나도 요즘 그런 느낌이다. 대개 응암에서 시작해서 상암까지 걷는데 응암에서 상암까지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날은 좀더 걷고 싶어 조금 더 먼 상암까지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선선한 기운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내내 앞만 보았던 고개를 옆으로 돌리게 된다. 왜 갑자기 시원해졌지? 그러면 주위에 사람들이 적어지고, 나무들이 많아진 게 보인다. 그리고 요즘 바람이 달라졌다. 여전히 덥지만 바람에 차가운 기운이 섞여있다. 전보다 땀이 덜 나고 조금 시원해졌다. 순간 가을이 오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있으면 나무들의 빛깔이 달라지겠구나. 바람이 달라지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여름이 가는 게 아쉬워졌고, 가을이 좀더 기다려졌다. 얼마 전에 본 영화 <마지막 4중주> 생각이 났다. 거기서 한겨울에 조깅을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겨울에 걷을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추운 날 걷는 게 더 좋다. 이상하게 그렇다. 추우면 더 기운이 난다. 이 책에도 추운 겨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목도 마음에 든다. '눈, 해산물, 운하, 맥주, 친구'.

     

        행사를 끝마치고 나올 때부터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근처 맥줏집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다음과 같다. 눈, 해산물, 운하, 맥주, 친구. 이 중에서 두 개만 동그라미를 칠 수 있어도 대단한 행운인데(몇 년 전 홋카이도 오타루에 갔을 때, 나는 다섯 개에다 모두 동그라미를 칠 수 있었다) 그 날은 4개까지 가능했다. 새벽까지 눈에 두 번 동그라미를 칠 만큼 많은 눈이 내렸고 서울의 교통은 마비됐다. 결국 나는 홍대 앞에서 폭설에 고립되는 행운을 맞은 것이다. 진짜 인생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진짜 인생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뜻하지 않은 폭설이라면 최고의 인생이리라.

    p.70

     

        내가 찾던 문장은 267페이지에 있었다. 제목은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썼다. 소설 얘기는 하지 않고 건방지다거나 세상에 너무 화를 내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간신히 소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면 상당히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다거나 재미없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돌아온 날이면 언제나 잠을 설쳤다. 말하지만 나는 비가 내릴 때마다 젖는 사람이었고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는 사람이었다. 소설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 마음은 너무나 쉽게 허물어졌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마치 사랑하는 여자와는 결혼하지 못하는 소심한 남자처럼.

     

       그 프린트물에 없던 문장이 다음 페이지 268쪽에 나온다.

     

       그렇다면 젖지 않는 방법은,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나 자신이 너무나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겁내지 않는 상태.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는 상태.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대단히 가슴이 떨린다. 왜냐하면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정말 안 되는 일이니까. 그제야 나는 용기란 한없이 떨리는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게 바로 세상의 모든 영웅들이 한 일이다.

     

     

     

     

     

        이건 오늘 걸으며 찍은 사진들. 걸어서 상암까지 가서 <투 마더스>를 보고 다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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