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D-2
    모퉁이다방 2021. 5. 30. 14:55

     

     

      아빠는 롯데팬인데, 야구 이야기를 하면 자신은 그리 팬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니까 그 시간마다 보게 되는 거라고. 신기하게도 이른 휴가가 시작되고 집에만 있게 되자 매일 야구를 챙겨보게 되었다. 아빠 말대로 월요일을 제외하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니 보게 되더라. 미세먼지 가득한 날도 있지만 맑은 날들도 꽤 있어 푸른 잔디밭과 맑은 하늘, 뻥- 소리를 내며 멀리멀리 날아가는 공들도 볼 수 있고, 뭔가 축구나 농구와 달리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긴장되는 경기의 흐름도 그렇고. 경기장 한가로운 자리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 잔하면 정말 좋겠다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다 하루키 생각이 났다. 하루키가 한가롭게 야구경기를 보다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작가의 말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책은 이사를 하면서 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다행히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이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해 팔지 않았다. 

     

     

      1978년 4월의 어느 쾌청한 날 오후에 나는 진구 구장에 야구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해의 센트럴리그 개막전으로,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히로시마 카프의 대전이었습니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낮 경기입니다. 나는 그 당시부터 야쿠르트 팬이었고, 진구 구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센다가야의 하토노모리하치만 신사 옆입니다) 산책 나간 김에 자주 야구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 무렵의 야쿠르트는 아무튼 약한 팀이어서 만년 B 클래스에 구단도 가난하고 화려한 스타 선수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인기도 별로 없었어요. 개막전이라고 해봐야 외야석은 텅텅 비었습니다. 나 혼자 외야석에 드러누워 맥주를 마시면서 경기를 봤습니다. 당시의 진구 구장 외야석은 의자가 아니라 잔디 비탈뿐이었습니다. 무척 상쾌한 기분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늘은 맑게 개고 생맥주는 완벽하게 시원하고 오랜만에 보는 초록빛 잔디 위에 하얀 공이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야구란 역시 야구장에 가서 봐야 하는 것이지요. 진짜로 그렇습니다. 

      야쿠르트 선두 타자는 미국에서 온 데이브 힐턴이라는 호리호리한 무명의 선수였습니다. 그가 타순 1번이었습니다. 4번은 찰리 매뉴얼입니다. 나중에 필리스의 감독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당시 그는 실로 힘세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타자여서 일본 야구팬에게는 '붉은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선발 투수는 분명 다카하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쿠르트의 선발은 야스다였습니다. 1회 말, 다카하시가 제1구를 던지자 힐턴은 그것을 좌중간에 깔끔하게 띄워 올려 2루타를 만들었습니다.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때마침 내 손안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아무튼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도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시합이 끝나자(그 시합은 야쿠르트가 이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전차를 타고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원고지와 만년필(세일러, 2,000엔)을 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워드프로세서도 컴퓨터도 보급되지 않아서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신선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만년필을 사용해 원고지에 글씨를 쓰다니, 나로서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밤늦게 가게 일을 끝내고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소설을 썼습니다. 새벽녘까지의 그 시간 외에는 내가 자유롭게 쓸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략 반년 만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을 썼습니다(당초에는 다른 제목이었지만). 초고를 다 썼을 때는 야구 시즌도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해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에서 최고의 투수진을 거느린 한큐 브레이브스를 깨부쉈습니다. 그것은 실로 기적 같은, 멋진 시즌이었습니다. 

    - p. 45-47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학

     

     

       독서대에 책을 펼쳐 45페이지에서 47페이지를 옮겨 적었다. 방 창문은 활짝 열려 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리고 생각했다. 초여름은 뭔가를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그러니 당신도, 나도 뭔가를 시작해보자.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