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여행자 - 하이델베르크
김영하 지음/아트북스 





   중학교때 좋아하던 만화책이 있었습니다. 이은혜의 점프트리 에이플러스, 말도 안되는 로망들을 제게 안겨주었죠. 여중을 다니고 있던 제게 남녀공학의 로망을, 오빠가 없던 제게 다정하고 자상한 오빠에 대한 로망을, 짝사랑따위도 하고 있지 않았던 제게 두 멋진 남자선배의 동시다발적인 사랑을 받는 로망을. 새 단행본이 나오는 날이면 한걸음에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와서는 제 방문을 살포시 잠그고, 가장 좋아하는 음악들을 녹음해놓은 테잎을 방 안 가득 틀어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장 한장 아껴 읽으면서 느꼈던 두근거림, 방 안 공기의 흐름, 흘러나오던 음악의 촉감. 무슨 음악이였는지, 무슨 장면때문인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의 제 방 풍경은 지금도 또렷합니다.

   김영하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받아들고서 약간 실망했습니다. 일단 너무 얇았고, 쭉 넘겨봤을 때 글은 짧고, 반 이상이 사진이였거든요. 일단 한 쪽 구석에 놓아두었어요. 금방 읽어버릴 것만 같아서. 언젠가 읽어야 될 '때'가 올 거라고 믿었거든요. 그리고 오늘 읽었습니다. 책 뒤에 부록으로 있던 CD를 꺼내서 컴퓨터 CD롬에 넣고, 플레이를 시켰습니다. 음악이 좋았어요. 잔잔하고 뭉클한 음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첫장을 넘겨 여행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처음, 단편소설입니다. 밀회. 주인공의 이름도 없습니다. 그저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나'와 '그녀'가 나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하이델베르크에 머무르는 '내'가 찍은 듯한 그 거리의, 그 도시의 풍경들이 찍혀진 사진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와 '그녀'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소설이 끝이 났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이 좋았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사진들입니다.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진들이요. 그 사진들을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뒤의 '내'가 본 하이델베르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쓸쓸하고 적막한 사진들이였어요.

   그리고 사진들이 이어지고, 3편의 간단한 에세이가 이어집니다. 작가의 카메라에 관한, 하이델베르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 이 구절이 너무 멋져서 다이어리에 옮겨 두었습니다.

   "한 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산천은 의구한데 오는 '나'만 바뀌어 있다는 것, 그런 달콤한 쓸쓸함이야말로 '다시 가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조라는 뜻일 것이다. p.148

    그리고 책은 끝났습니다. 틀어준 CD속에는 14곡의 음악이 들어있었고, 책을 다 읽었지만 음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끝까지 CD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 방의 공기의 흐름, 그 위의 음악들, '나'의 슬픈 이야기, 도시의 쓸쓸한 사진들을 다시 한번 봅니다.

    짧아서 아쉬웠지만 좋았어요. 다음 도쿄편도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