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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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날,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7. 5. 17. 21:08
여행 끝에 선생님은 놀라운 말을 했다. "덕분에 즐거운 여행을 했어요. 혼자 왔으면 보지 못했을 것을 봤어요." "선생님, 저도 즐겁게 놀다 가요. 선생님은 세상에서 제일 관대해요. 저를 용안사에 데려갔잖아요. 기쁨은 희귀한 것이니 기쁨을 주는 사람만큼 관대한 사람은 없어요. 기쁨을 느꼈으니 잘 논 것 아닌가요?"- p.103 정혜윤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中 오키나와에서의 마지막 날, 비가 왔다. 비가 많이 왔다. 우리는 펼쳐놓았던 짐을 챙기고, 시큰한 냄새가 고요하게 나던 숙소를 나왔다. 빗길을 걷고 횡단보도를 두어 개 쯤 건너 인적이 드문 커다란 길가의 정류장에 섰다. 시내의 백화점에 가기로 했다. 막내가 첫날 사고 싶어했는데 고민하다 사지 못했던 것들을 사고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버스가 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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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7. 5. 11. 21:23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만났다.'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이 문장을 좇아 마침내 여기 서 있어, 라고 생각하니 행복으로 마음이 뻐근했다. 눈앞에는 나를 크레타까지 데려다 줄 거대한 6층짜리 배가 서 있었다. 십사 년 전의 일이다. 그리스에 가면 뭐가 있는데? 하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나는 무심코 이 말부터 나올 것 같다. 카잔차키스의 묘지가 있지. 그 묘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작은 이오니아식 마을과 에게 해가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볼 만한 곳이야. 아마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김성중, '묘지와 광장' 中 끊어져버린, 작년 오키나와 여행의 기록들. 이제는 기억이 조금씩 가물가물해져버렸지만 (이러니 기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데), 기록을 이어가본다. 요즘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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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밤,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8. 3. 22:02
이제 뭘 하지?내 물음에, C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글쎄, 어디 카페나 갈까?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땀이 마구 흘러내렸다. 흙마당에서 뛰어놀던 동네 소년들이 우리를 보고 씩 웃었다. 수줍고 맑은 웃음이었다. 가도가도 쉴 만한 곳은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걷는 C는 미안한 표정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여기 좀 재미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정이현, '두고온 것', 중에서 버스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옛 미군기지였던 아메리칸 빌리지였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도시형 리조트 지대'. 우린 나머지 일정을 여기서 묵기로 했다. 중부 바다도 보고, 쉬엄쉬엄 쉬면서 이틀을 보내기로 했다. 아메리칸 빌리지에 도착하고, 가이드에게 여기서 내리겠다고 했다. 짐을 건네받고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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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오후, 츄라우미 수족관여행을가다 2016. 8. 2. 23:34
가장 늦게 도쿄에 도착한 친구가 가장 먼저 알아챘다. 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여행이 아니라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것까지도 친구는 간파했다. 커다란 공원에 도착해서 친구는 "철아,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너 혼자 여행해. 혼자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괜찮아지면 전화해"라고 등 떠밀었다. 나는 굳어진 얼굴로 나무 그늘 아래에 가서 mp3를 귀에 꽂고 수첩을 폈다. 밤나무 냄새가 너무 지독했는데 그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혼자 떨어져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점점 화를 떠나 보냈다. 두 시간쯤이 지나서야 나는 간신히 회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와 같이 여행하기에 꽤나 부적합한 인간 부류라는 걸. 이제 진짜 여행은 혼자만 떠나야겠다고.- 174~175쪽, 김민철 중에서 츄라우미 수족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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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오전,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7. 31. 22:38
끼니를 때워야 해서 호텔 밖으로 나가니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모스버거가 있었다. 서글서글한 아가씨가 주문을 받았다. 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아가씨의 일상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은 홋카이도 오타루의 KFC에서 너무나 권태로운 표정의 점원을 본 적이 있다. 오르골, 운하, 영화 의 대사 "오겡키데스카"로 유명한 동네에 찾아오는 얼빠진 관광객들에 지친 터프한 오타루 처녀. 빨리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날 생각만 하겠지. 자기 마을의 스시가 세계에서 제일 맛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구마모토 모스버거의 아가씨는 씩씩했다. 이 아가씨는 무슨 마음으로 시내 중심가가 아닌 낡은 구마모토 역의 모스버거에 지원했을까. 일은 즐겁게 하고 있을까. 여기서 친구는 사귀었을까. 아르바이트비로 무엇을 살까. 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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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오후,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7. 10. 21:27
남쪽 카페에서 할 수 있는 일.물이 빠진 바다를 앞에 두고 물이 가득찬 바다를 상상하는 일.저 멀리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이국에서 또다른 이국의 음악을 듣는 일.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일.한 시간에 한대씩 있는 39번 버스를 놓치지 않는 일.물이 가득한 풍경의 엽서를 사는 일.정이현의 문장을 읽고 마음이 움직이는 일. 해가 질 무렵엔 느릿느릿 뒷산에 올랐다. 푸시 산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여행자들은 그곳을 그냥 산, 혹은 뒷산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등산화를 신거나 등산복 비슷한 것을 입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반바지에 바닥 얇은 샌들을 질질 끌고 올랐다. 산 정상에 도착한다고 뭐 특별한 것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소문대로 해 지는 풍경이 꽤 아름다웠지만 그렇다고 다시는 못 볼 아주 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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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오전,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7. 7. 22:27
겨울, 술을 마시면서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따뜻한 남쪽으로 가고 싶다고, 올겨울은 마음도 몸도 유난히 춥다고.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 두고 있던 '따뜻한 남쪽'은 달랐다. 나는 통영과 제주를 이야기했고 그녀는 홍콩과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이야기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통영이든 제주든 홍콩이든 발리든 도착하는 대로 맥주를 마실 것이고 깊은 잠을 잘 것이었다. 그 다음날 그곳이 제주라면 모슬포에서 방어회를 먹고, 통영이라면 물메깃국을 먹는 상상도 했다. 가본 적 없는 홍콩과 발리에서의 여정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이곳에서 먹는 맥주보다는 더 맛있는 맥주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 박준, '우붓에서 우리는' 중에서 오키나와는 구름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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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7. 5. 16:38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일어나면 기억이 희미한 꿈 같았다. '아이슬란드.'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 진짜 집에서 멀리 떨어진듯한 아득함이 느껴진다. 하루종일 지지 않던 여름의 태양 그리고 절대 떠오르지 않던 겨울의 태양, 그 하늘에 슬그머니 뜬 희미한 달과 치맛자락처럼 펄럭거리는 오로라, 북극에서 낮게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을 묵묵히 맞으며 견디고 서 있는 양들, 구불구불 이어지는 작은 언덕들과 그 위로 양탄자처럼 깔려 있는 이끼, 눈 덮인 산과 거친 바다와 검은 모래사장,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천 개의 폭포와 호수, 아직도 끓어오르고 있는 땅,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러기들, 서서히 녹아내린다는 빙하, 어디가 음절의 시작이고 끝인지 모르는 낯선 언어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과묵하고 고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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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불어넣기서재를쌓다 2016. 6. 16. 21:59
이 책의 본래 제목은 이었다. 나는 일 때 이 책을 샀다. 누군가 추천해 준 책, 이라고 기억한다.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따라 읽은 책, 일 수 도 있다. 이 책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단편 '혼 불어넣기'를 오키나와에서 다시 읽었다. 세상에, 오키나와에서 이 단편을 다시 읽다니. 나는 이 단편을 다시 읽기 전, 오키나와 북부 버스 투어를 했다. 우리는 뚜벅이었기 때문에 북부로 가려면 투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투어에서 갔던 장소들은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지만, 버스 안에서 가이드에게 들었던 오키나와와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가이드가 말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성향은 분명 일반화의 오류일 거다. 모두가 똑같을리가 없지. 그렇지만 나는 상상해봤다. 좋은 게 좋다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