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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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내력 - 고독한 주문을 외자서재를쌓다 2008. 6. 27. 14:00
돌의 내력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박태규 옮김/문학동네 나는 이 책을 '돌의 내력'을 담은 장편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144페이지에서 뚝 끊겼다. 그래서 큰 챕터가 나눠진 것이라 생각하고 '세눈박이 메기'를 읽었다.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돌의 내력'은 144페이지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은 '돌의 내력'과 '세눈박이 메기' 두 중편소설을 담은 책이다. '돌의 내력'을 읽다 가슴이 시릴대로 서늘해진 나는 갑자기 밝아진 분위기의 '세눈박이 메기'를 그냥 덮어버리고 읽지 않으려 했다. 이건 순전히 '돌의 내력'의 서늘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돌의 내력'을 쓴 작가라는 생각에 끝까지 읽어냈다. 그러다 이 문장을 발견했다. 279페이지.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이 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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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책 - 읽는 것은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서재를쌓다 2008. 6. 26. 15:26
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내가 가진 유일한 세계지도, 삼성지능업 세계지도에서 보자면 터키를 대표하는 건 성 소피아 성당이다. 포털 검색창에서 '터키 성 소피아 성당'이라고 치니 성 소피아 성당을 앞에 우뚝 세우고 가지각색의 하늘이 펼쳐진다. 사파이어 빛깔의 파아란 하늘, 금세 쏟아질 것 같은 회색빛 하늘, 노을을 품은 주홍빛 하늘, 야경만 환히 빛나는 까아만 하늘. 성당의 지붕, 돔 위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사진도 있다. 이 즈음이 의 계절일테지. 이 곳에서 쓰여진 책을 읽었다. 언젠가 친구가 꼭 가보고 싶어했지만 결국 계획에서 빼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던 나라, 터키. 내겐 사람에게도 그렇듯 책에게도 첫인상이 있다. 물론 사람에게도 첫인상을 착각해 나랑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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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걸즈 - 그건 굿, 바이의 해피엔딩무대를보다 2008. 5. 29. 02:38
사실 그런 질문은 애시당초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굿은 아니지만 바이를 했고, 상황은 디 앤드되었으니까. 부산역 근처 호프집에서였다. 헤어진 지 5년이 지난 뒤였다. 잘 지냈느냐, 살이 좀 쪘네 마네, 맥주잔 언저리를 매만지며 어색한 말들을 주고 받고 있던 중에 갑자기 내 입에서 그 질문이 튀어 나와 버렸다. 정말 그 날 나는 바보 같았다. 너무 바보 같았다. 친구가 택시를 잡고 뒷좌석에 들어가 앉는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그야말로 엉엉 울었다. 그 당시에는 쪽팔려서, 바보 같아서, 살이 쪄버려서 이렇게 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건 그제서야 끝난 굿, 바이였다. 그냥 바이가 아니라 굿바이였다. 내 마음에 한 톨의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은 완벽한 해피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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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 판매자 김영하가 건네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서재를쌓다 2008. 5. 23. 15:50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마음산책 알라딘 중고샵에서 '김영하'라는 판매자 이름을 발견했다. 김영하? 그 김영하? 정말? 판매자 김영하가 내어놓은 중고책 리스트를 봤다. 책의 권수도 많았고, 그 중에 한국소설도 많았다. 아, 이 책을 왜 파는거지? 소장하시지 않고? 나는 판매자 김영하를 그 김영하로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책은 출판사에서도 보내주고 직접 구입도 하고 그러그러해서 두 권이 생긴 걸거야. 그래서 알라딘 중고샵도 오픈했다, 재밌겠다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대방출하는 거겠지. 언젠가 책이 너무 많아 둘 곳이 없어서 한번씩 헌책방에 판다는 이야기를 읽은 것도 같다. 아, 그래도 이 책은 가지고 계시는 게 좋을텐데. 그러다 상품상태에 구입날짜와 서명이 적혀져 있다는 책들을 발견했다.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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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정혜윤 언니가 생각해 낸 수십권의 책서재를쌓다 2008. 5. 22. 17:31
침대와 책 정혜윤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구식이라 그런지 모니터 상으로 긴 글을 잘 읽어내질 못하겠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긴 글은 출력해서 읽는 경우가 많다. 마우스로 쭉쭉 내리며 보고 나서 다음 페이지를 클릭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글은 왠지 글이 아닌 것만 같다. 하얀 종이 위에 새겨진 까만 글자들을 매끈한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침을 묻히며 넘겨 읽어야만 진정 글을 읽는 것만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매일 들르는 채널예스에서 자주 업데이트 되는 정혜윤PD의 칼럼에서 제일 정확히, 자주 읽었던 건 마지막의 소개글이었다. 그리고 이 몽롱한 그림같은 표지사진 가운데 하얗게 삐뚤빼뚤 새겨진 침대와 책. 그러니까 불면 날라가버릴 인터넷 칼럼이 아닌, 힘이 센 내가 아무리 헥헥대며 불어도 날라갈리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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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자식, 좀 웃기더라서재를쌓다 2008. 5. 18. 16:08
완득이 김려령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친구네 자취방은 옥탑방이었다. 그 건물의 3층까지 올라가다보면 큰 철제문이 나왔다. 왜 대문에나 있을 법한 그런 철제문. 그 철제문을 열쇠로 따고 올라가면 주인집이 나오고, 한 층을 더 올라가면 옥상이 나왔다. 친구의 자취방은 거기 있었다. 말이 옥탑방이지 여름 밤, 문 열어놓으면 날벌레가 조금 들어오는 것만 빼곤 나는 그 방이 좋았다. 지은지 얼마 안 되서 깨끗하고 무엇보다 넓었다. 그 때 나는 동생이랑 둘이서 나란히 누우면 꽉 들어차는 좁은 하숙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의 옥탑방은 정말 대궐같았다. 안락하고 아늑했다. 친구는 자주 놀러오라고 하고선 밥도 만들어주고, 술도 사다줬다. 친구의 옥탑방에서 가장 좋았던 건 자고 가고 다음 날이었다. 문을 열고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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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 참 다행이다, 당신 글을 읽을 수 있어서서재를쌓다 2008. 5. 17. 21:59
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꿈에 김연수 작가가 나왔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중요한 건 '내' 꿈에 김연수 작가가 나왔다는 거다. 꿈이 미래를 예언해주는 건 아닐까 간절히 바라면서 깨어나던 아침들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꿈을 부여잡고 놓칠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예언처럼 깨달았다. 그 집착이 참 부질없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 꿈을 꾸고 프로이트의 을 뒤적거리는 날들은 없다. 누군가 내 꿈에 나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는 거다. 무언가 켜 둔 채로 잠에 들었거나, 그 사람을 많이 생각했거나. 이번의 경우는 후자다. 김연수 작가의 블로그에서 곧 여행에 관한 산문집이 나온다는 글을 보고 그 뒤로 매일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서 '여행할 권리'를 검색했다. 알라딘에서는 모린 오코너의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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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 라일라의 봄을 꿈꾸며서재를쌓다 2008. 5. 16. 12:14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현대문학 얼마 전 세계지도를 샀다. 뉴스에서 듣는 나라들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순간들이 많아진 후로 커다란 세계지도를 하나 사서 벽에 붙여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빛깔이 예쁜, 저렴한 것으로 구입했다. 바다는 짙은 하늘빛, 대륙은 아이보리 빛깔이다. 진하게 새겨진 나라 이름 옆에 그 나라의 특산물이나 명소가 귀엽게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태평양의 한 가운데 돌고래 두 마리가 사이좋게 뛰어 놀고 있고, 북극의 그린란드에선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개 두 마리가 헉헉거리며 눈썰매를 끌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벽에 붙여놓은 지도를 미술관의 명화를 감상하듯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찌나 평화로운 곡선과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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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 우리의 오늘도 영화가 될 수가 있다서재를쌓다 2008. 5. 12. 11:26
오늘의 사건사고 시바사키 토모카 지음, 신유희 옮김/소담출판사 를 '읽은' 건 를 재밌게 '보았기' 때문에. 영화 의 원작 소설과 원작자가 영화 촬영 현장에 다녀온 뒷 이야기가 함께 있는 책이라고 해서 집어 들었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영화가 훨씬 낫다. 소설은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촬영장을 다녀온 뒷 이야기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별 게 없었다. 영화는 원작소설을 거의 그대로 스크린에 옮겼다. 건물 속에 끼인 사내 이야기와 마지막 해변의 고래 이야기만 첨가하고.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는데, 역시 결론은 영화가 훨씬 이 사소하고도 소소한 이야기를 잘 표현했다는 것. 똑같은 시간이지만 여러 장소에서 상상하지도 못할 많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의 감독도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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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나의 뒷모습을 마주하는 일서재를쌓다 2008. 5. 7. 09:10
첫사랑 수필드림팀 지음/해드림출판사 첫사랑. 처음 표지를 보고선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라 생각했다. 뒷모습이라니. 덧니 하나가 박혀 커다란 미소를 터뜨리는 앞모습이여도 부족할 터인데 무얼 보고 있는지,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뒷모습과 첫사랑이라니. 그렇게 심드렁하게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장. 책을 덮고 ‘첫사랑’이란 제목과 나란히 앉은 표지의 뒷모습을 다시 마주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뒷모습은 ‘사랑’이리라. ‘첫’은 빨간 색으로 칠해져 확실히 뒷모습 위에 위치하고 있다. ‘첫-’은 ‘풋-’이 그렇듯 다음 단어를 더 싱그럽고 아련하게 해 줄 빠알간 접미사일 뿐이다. 그러니 사랑과 나란히 앉은 두 볼이 발그레할 것이 분명할 ‘첫-’스런 뒷모습. 헝클어진 듯 자연스레 묶은 머리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