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취향
어제는 시옷의 모임이 있었다. 이 책은 출간하자마자 읽었는데, 어제 을지로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던 구절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주앉아야 한다.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술이 아니라면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야 한다. 그리고 별 거 아닌 오늘 하루를 말해야 한다. 당장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쌓이면 견고한 '우리'가 되니까. '우리'는 함께 즐거울 것이다. 함께 어려움을 넘을 것이다. 오해가 쌓일 틈은 없을 것이다. 서운함이 쌓일 겨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주앉아 오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상." 어제 우리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 만선호프의 야외자리에 앉아 생맥주와 노가리, 닭똥집 튀김, 두부김치, 오징어 숙회, 김 안주를 차례대로 시키면서 늦여름 토요일 밤을 즐겼다. 을지로 골목에는 맥주 마시는 사람들로 그득했고, 달은 동그랬고, 바람이 간간이 불었다. 책은 멤버의 반은 읽었고, 반은 읽지 않았다. 그 반은 김민철 씨의 책을 모두 읽었는데, 한 작가를 다같이 이렇게 같은 시기에, 같은 속도로 알아가고 있다는 게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튼 책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고, 간만에 만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먹고 마셨다. 둘은 새로운 직장에 출근을 했고, 또 둘은 이사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연애가 계속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늘 에너지가 넘치는 N은 금요일마다 오리발을 들고 출근을 한다고 했다. 수영과 필라테스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G는 내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글을 써보라고 했다. 2차로 종로의 포장마차까지 간 우리는 각자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새벽 시간까지 깨어 있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뭔가 피곤하면서도 조금은 벅찬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제의 우리도 <하루의 취향>의 어느 한 챕터를 차지 할 수 있었을 거다. 우리 각자의 <하루의 취향>에. 책날개에 이런 글이 있다. "취향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실패와 시도 끝에 생겨나는 결과물이다. 고상하고 우아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속에서 계속 스스로와 마주하게 된다는 점. 이 책은 그 과정에 관한 것으로, 그날그날 마음이 이끄는 쪽을 바라보며 쓴 글이다. 좋아하는 음악, 책, 취미처럼 단편적인 것에서 시작해 사람 취향, 싫음에 대한 취향, 나라는 사람에 대한 취향까지, 흔들림의 과정을 통해 선택한 가치들이 삶의 중심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옷의 모임을 하고 나면 늘 나를 마주보게 된다. 그리고 어제보다 좀더 나은 오늘을 살고 싶어진다. 이상하게 그렇다. 이 책도 그런 책이다. 나다운 하루, 좀더 나답기 위해 하는 노력들이 담겨 있다.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 <하루의 취향>까지. 삼 년여에 걸쳐 김민철 작가를 조금씩 알아왔다. 여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모든 요일의 기록>이지만, <하루의 취향>까지 읽고나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우리가 바짝 가까워진 느낌이다. 작가의 일상 이야기가 이 책에 제일 많다. 궁금했던 남편 이야기도. 제일 좋았던 글은 지하철에서 다시 읽어보니 '우리도 사랑일까'. <봄날은 간다>의 상우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도 사랑일까>의 루 이야기를 거쳐 자신의 남편 이야기로 끝나는 그 글. 그 글의 끝은 이렇다. "상우의, 루의 사랑 취향을 가진 나는 어떤 남자와 결혼했냐고? 언젠가 남편이 내게 말했다. "사랑은 한 사람을 평생 알아가는 과정이야." 여기, 이 사람의 사랑에 관한 가치관이 모두 들어 있다. '한 사람을', '평생', '알아가는', '과정'. 이 단어들의 의미 하나하나는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 말을 한 사람과 결혼했다. 자랑은 여기까지." <우리도 사랑일까>를 다시 봐봐야겠다. 순전한 루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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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오래오래 곱씹었다. 그렇다. 이 집은 우리의 선언이었다. 과도한 대출을 받아서 비싼 동네에 비싼 집을 사고 그게 오를 거라 기대를 하며 하루하루 빚을 갚으며 지금의 행복을 유예하는 삶에 대한 거부. 우리 깜냥의 대출을 받아서 오를 거라는 기대도 없이 나중에 부자가 될 거라는 희망도 없이 지금 잘 꾸며놓고 지금 잘 살겠다는 선언.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우리 둘이 괜찮으면 괜찮다는 우리 삶에 대한 선언.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을 단단히 묶었다. 그렇게 공사가 시작되었다.
- 29쪽
몇 주 후 엄마와 이모가 우리 집에 다녀갔다. 가장 반대하던 그들이었기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들은 우리가 꾸며놓은 집을 보는 순간, 단숨에 우리의 선언을 이해했다. 그때 알았다. 원하는 대로, 내 취향대로 살아버리는 것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선언이라는 것을. 내 인생을 선언할 권리는 결국 나에게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망원호프는 우리 삶에 대한 선언이 되어버렸다.
- 29-30쪽
"어젯밤, 벚꽃 산책 진짜 좋았어요."
"벚꽃 산책?"
"응."
"누가? 우리가?"
이럴 수가. 설마 기억을 못하는 것인가. 완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선배에게 말했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데, 좋은 날이 오면 최대한 길게 늘려야 한다며, 그래서 나 데리고 나갔잖아요."
"아, 아. 기억난다. 거기 벚꽃 너무 좋지?"
"완전 완전 완전 좋았어요. 선배는 좋다면서 풀밭에서 막 뒹굴었잖아."
선배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뒹굴었다고? 그 풀밭에서?"
"응. 한강 내려다보이는 그 풀밭에서. 나도 같이 뒹굴까하다가, 나는 관뒀지 뭐."
"진짜 내가 뒹굴었어? 거기에?"
"응. 기억 안 나요?"
"거기 완전... 온 동네 개들이 나 와서 볼일 보는 풀밭이야... 내가... 거길... 뒹굴었다고?"
나도 완전 굳은 표정으로 선배를 잠깐 바라봤다. 또 선배의 필름이 끊어졌던 것이다. 이제 내가 뒹굴 차례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뒹굴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
- 4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