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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극장에가다 2022. 6. 15. 13:44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어요) 평이 그리 좋지 않던데, 나는 꽤 울었다. 결말이 좋았다. 꿈 같은 결말이었다. 아이를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고 마음을 쓰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우는데 필요한 사람이 부모만은 아니라는 걸 1년 동안 아이를 키워보니 확실히 알겠다. 부모의 노력과 힘과 마음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여러 이모삼촌도 필요하고 여러 할머니할아버지도 필요하고 여러 선생님도 필요하고 여러 친구도 필요하고 여러 언니누나동생도 필요하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노심초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의 나는 그곳에서 아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다고 믿는다. 매번 그렇지 않을 수 있겠지만 많은 시간 그럴 거라고 믿는다. 매일 등원 때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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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모퉁이다방 2022. 6. 9. 22:24
친구가 그랬다. 돌 즈음부터 무척 행복했던 것 같다고. 그 전까지는 육아가 참 고되었는데 돌이 지나면서부터 아이가 너무너무 예뻐지더라고. 너도 그럴 거라고. 아직 걷지는 못하는데 다리 힘이 꽤 생겼다. 어린이집에서는 곧 걸을 것 같다며 매일매일 걷기 연습을 한다는데 집에서는 그냥 놀게 둔다. 어제는 미끄럼틀을 혼자 힘으로 탔다. 계단이 두 개 있는 낮은 미끄럼틀이긴 한데 한번 타니 계속 탄다. 기특한 녀석- 요새 많이 웃고 짜증도 곧잘 낸다. 책을 끊임없이 읽어달라고 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페이지를 찾아 그 부분만 읽어달라고 한다. 여전히 공놀이를 좋아하고. 남편은 새로운 장난감을 당근 거래를 해서 들여오곤 한다. 요즘 아이는 여덟시 부근에 잔다. 시간이 얼추 되면 얼굴을 씻기고 로션을 바르고 밤기저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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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이 이모모퉁이다방 2022. 5. 26. 22:14
오늘은 은경이가 동네로 왔다.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작년에는 둘 다 모유수유 중이었고 두 아이 다 아주아주 작았고 24시간 아이와 함께였는데, 오늘은 두 아이 다 어린이집 가 있는 시간에 평소 가고 싶었던 화덕피자집에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새 1년이다. 2주 차이 나는 아이들은 쑥쑥 커서 얼마 전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마당에 작은 수영장이 있는 서울의 풀빌라 숙소였는데 함께 수영도 했다. 처음 어린이집 보낼 때 노심초사했었는데 그 걱정들은 사라진지 오래다. 시간이 촉박해 지안이 하원할 때 은경이도 함께 갔다. 지안이는 엄마와 이모를 보고 활짝 웃었고 이모는 하원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줬다. 이모는 반가워 한번 안아보려 했지만 요즘 심하게 엄마 껌딱지인 지안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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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일기모퉁이다방 2022. 5. 10. 14:43
지난밤에 일기를 꼭 쓰자 다짐했었다. 언제였냐면 일요일 밤. 텃밭에서 상추와 치커리 고수를 따와 삼겹살을 구으려 하는데 남편의 소주가 없었다. 같이 맥주를 마시자고 하니 나가서 소주를 사오겠단다. 남편이 설거지 중이어서 그럼 내가 후딱 다녀온다고 했다. 슬리퍼를 신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우두두 쏟아졌다. 태풍같은 바람도 불었다. 나무들이 바람에 휘청거렸다. 다시 우산을 가지러 올라가기는 귀찮아 시작되는 비를 맞으며 편의점에 다녀왔다. 영화 생각이 났다. 영국에서 LA로 집을 바꿔 여행 온 케이트 윈슬렛이 맞은 태풍의 바람 같았다. 그녀는 낯선 여행지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따듯한 시간들을 보냈다. 소주와 맥주를 넉넉하게 사고 돌아오는 길, 내일은 꼭 블로그에 일기를 남기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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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모퉁이다방 2022. 3. 4. 14:37
어제는 갑자기 체온이 38도까지 올라갔다. 우리집 알람시계 지안이는 어김없이 7시 기상을 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항상 무거운 몸이었지만 어제는 더 무거운 거다. 손목을 비롯한 온몸의 관절이 욱신거렸다. 체온을 재보니 심상치 않았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지금껏 만나는 사람들 코로나만 걱정했지 내가 걸릴 줄이야. 남편은 걸릴 리가 없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했지만 (낙관주의자) 나는 온갖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비관주의자) 해열제를 한 알 먹고 지안이가 낮잠 1을 잘 때 한 숨 잤는데 체온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리 사둔 자가키트를 꺼냈다. 일회용 장갑을 끼고 면봉으로 코 두 곳을 모두 쑤셔 돌리고 용액에 휘젓고 검사판에 3-4 방울 뿌렸다. (결과 사진을 남편에게 보냈더니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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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모퉁이다방 2022. 2. 18. 11:15
어제는 남편이 저녁약속을 잡았다고 해 뭔가를 시켜먹어야지 했다. 내가 내린 커피 말고 남이 내린 커피와 달달한 간식이 땡겨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아예 2-3인 세트메뉴를 시켰다. 음료가 두 잔 포함되어 있고 샌드위치 하나, 샐러드 하나, 식빵에 카야잼 바르고 버터를 끼운 디저트가 있는 메뉴이다. 늦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세트 하나로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음료 두 개는 뭘 고를까 고민하다 당장 마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두고 먹을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켰다. 언제든 뜨거운 물이나 차가운 얼음을 채워 마시면 되니까. 남편이 어제 통닭을 사들고 귀가해주시는 바람에 (많이 컸다. 빈손으로 들어와 나를 화나게 하기 일쑤였는데) 샐러드와 샌드위치 반쪽, 에스프레소가 남았다. 지안이 낮잠1 재우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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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키로모퉁이다방 2022. 2. 17. 11:07
요즘 지안이는 낮잠을 두 번 잔다. 오전 아홉시에서 열시 즈음에 한 번, 오후 두 시에서 세 시 사이에 한 번. 짧으면 사십분 길면 두시간까지. 두 번을 합하면 낮잠시간이 세 시간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옆으로 눕혀 토닥토닥해주면 잘 자기도 했는데 혼자 앉을 수 있게 되면서 시도때도 없이 앉는다. 코-오 자보자 눕히면 얼굴 가득 웃음기가 돌면서 앉고,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도 가만히 앉아 어둠 속에서 뭔가 잡을거리를 찾아 혼자 사부작사부작 한다. 그러다 자기 깬 걸 엄마가 계속 모르면 칭얼대는 소리를 내며 이제 그만 일어나라 하고. 오늘은 옆 아파트 경은씨가 유모분만을 하는 날이라 했다. 내 수술날 생각이 났다. 수술 앞뒤로 받은 격려의 문자들과 그날 아침 사촌동생의 부재중 전화. 사촌동생은 그 날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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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슬라이드모퉁이다방 2022. 1. 28. 23:16
남편이 성대 낭종제거수술을 받고 왔다. 수술 전에 긴장되지 않냐고 하면 전혀- 라고 말했던 사람인데, 전신마취가 기계호흡인 줄 몰랐다고 알았으면 엄청 쫄았을 거라고 띄어쓰기 발음이 어색한 음성앱으로 말했다. 1-2주는 말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전신마취는 원래 이렇게 머리가 띵한 거냐며 이상한 거 아니지? 라고 메모장에 써서 보여줬다. 나는 호흡을 길게 하고 누워서 쉬라고 했는데, 왠지 아이를 보는 나를 두고 방에 들어가 버리는 게 미안한지 소파에 누워 일어나질 않더라. 남편이 기진맥진해 소파에 누워있는 동안 나는 아이 이유식을 먹이고, 분유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입속을 닦아주고, 침독이 가득한 입가에 로션도 발라줬다. 이제 자기만 하면 되는데 오래 칭얼대더라. 힘든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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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모퉁이다방 2022. 1. 26. 00:40
저녁밥을 먹으며 남편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평소 같으면 그리 생각하지 말아라로 시작하는 말을 분명히 했을텐데 오늘은 왠일인지 그러지 않고 묵묵히 들어줬다. 정말 고마웠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오늘은 정말 그런 사람이 내게 필요했거든. 오후에는 지난 일요일에 보지 못한 을 봤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나왔던 비포 시리즈 마지막편 의 한 장면에 손미나 작가가 말했다. 줄리 델피가 산 너머 지는 석양을 보고 아직 있다, 아직 있어, 졌다, 라고 읊조리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는 졌지만 원래 그뒤부터 하늘은 더 아름다운 법이라고. 그러니 로 시작한 이들의 사랑은 변했다기보다 농익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그 표현이 너무 좋아 휴대폰 메모장을 켜놓고 메모를 했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