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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여행을가다 2020. 8. 17. 14:00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집앞 마트갈 때 신는 다이소 쪼리로 갈아신었다. 비행시간이 얼마였더라. 벌써 일년 전의 일. 결혼식은 일요일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친척, 가족과 인사를 하고 군포집으로 돌아왔다. 단둘이 군포집에 있는 건 두번째였을 거다. 들어오는 길에 얼음이 가득 든 아메리카노를 사서 마셨다. 집에 들어와서는 대절한 버스에 옮겨두고 남은 캔맥주를 두 개 꺼내 각자의 컵에 가득 따랐다. 그리고 건배했다. 아,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 아침일찍 화장과 머리를 하러 약속시간에 예식장에 갔다. 그 뒤 순식간에 예식이 시작되었고, 아빠는 행진하기 직전까지 주례사를 완성하지 못해 나를 멘붕에 빠뜨렸는데 좋은 하객들 덕분에 웃으며 주례사를 끝낼 수 있었다. 소윤이는 눈물의 축사로 우리를 감동시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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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서재를쌓다 2020. 8. 11. 22:27
를 구입했을 때 함께 온 사은품 달력을 8월로 넘기니 훌라춤을 추고 있다. 저자들과 고양이 한마리가. 그렇다면 8월은 훌라춤을 출만큼 신나는 달인 것인데, 올해는 비에 비에 비네. 종일 장마다. 1호선을 타며 제일 좋은 점은 내내 바깥이 보인다는 것. 겨울에는 출근길에는 해가 뜨기 전이라 퇴근길에는 해가 진 후라 어둠 뿐이었는데 여름이 시작되자 출근길도 퇴근길도 온통 밝고 푸르러졌다. 나뭇잎들이 여리여리한 연두빛이었다가 단단한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느날 퇴근길에 한강다리를 건너는데 해가 마침 불그스레 지길래 영상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멋있네~ 좋은 길로 다니네~" 메시지가 왔다. 바깥이 보여 제일 좋은 순간은 고개 숙여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을 만나고 가슴이 벅차올라 고개를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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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는다서재를쌓다 2020. 7. 19. 16:50
내 직업 인생은 팟캐스트 을 맡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런저런 곳에서 말할 자리들이 있기는 했지만 을 맡고서야 비로소 '말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 새로 시작하는 도서 팟캐스트의 진행을 맡아달라는 섭외를 받았을 때, 처음엔 망설였다. 일단 이름이 괴상한 느낌이었다. 또 난 이미 10년 넘게 프리랜서로 생활하고 있었고 장기 여행도 곧잘 떠나는 편이라 2주에 한 번 고정 스케줄이 생기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이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이었기에 나의 모토인 '하면 는다'를 되새기며 한번 해보기로 했다. 나는 '하면 된다'는 말은 싫어하지만 '하면 는다'는 말은 좋아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일단 해보면 조금은 늘 것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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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무국모퉁이다방 2020. 7. 14. 22:24
일요일에는 비가 왔다. 혼자 있는 동안 자두를 두개 꺼내 먹고 티비를 보다 잠이 들었다. 선잠이었다. 책을 읽으려다 실패했다. 갑자기 소고기무국 생각이 났다. 냉장고에 반쯤 남은 무가 있었다. 맑고 깊게 국을 끓여 새로 한 밥을 말아 푹 익은 김치를 얹어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귀리를 섞어 쌀을 씻은 뒤 밥솥을 닦고 취사 버튼을 눌러뒀다. 집에서만 입는 얇은 원피스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츄리닝 바지를 입었다. 우산을 쓰고 정육점에 갔다. 롯데슈퍼는 휴무였다. 슈퍼에 갔으면 뭔가 더 살 게 있었는데 정육점이어서 국거리용 소고기만 샀다. 정육점에 들어가기 직전에 백종원 레시피를 검색한 터라 수입산 국거리 소고기 200g 주세요, 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아저씨는 냉동인데 괜찮아요? 물었고 좋다고 했다. 두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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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캐쳐모퉁이다방 2020. 7. 5. 16:56
모성애라는 거 낳았다고 바로 생기는 건 아닌가봐. 친구가 말한 적 있다. 지금에야 둘도 없는 엄마가 되었지만 출산을 하고 난 뒤 아직 엄마가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함께 시간을 오래 보낸 지금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안방에는 침대와 서랍장, 친구가 선물해준 화분이 있다. 서랍장 위에 티비가 있고 가습기가 있고 여름이 되어 자그마한 선풍기도 마련했다. 청첩장을 담은 나무액자도 올려놓았고 이제는 향이 나지 않지만 여전히 올려둔 보경이의 디퓨저와 다이소 시계, 언젠가 솔이의 마니또 선물이었던 자그마한 조명이 있다. 침대 양옆으로 작은 공간이 있어 각자의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다. 나는 책도 올려놓고 스탠드도 올려놓고 고무줄과 안경도 올려놨는데 남편은 딱 핸드폰 충전기만 올려놓는다.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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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원그레이트극장에가다 2020. 6. 29. 09:02
(주의. 영화 썸원그레이트 스포일러로 가득한 글입니다.) 혼자 남은 토요일 밤이었다. 그냥 티비만 보기는 왠지 아쉬워 넷플릭스를 켜고 볼만한 영화가 없나 뒤적거렸다. 너무 무거운 영화 말고 조금은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 "낯선 도시에 근사한 직장을 구한 저널리스트 제니. 뉴욕을 떠나야 하는데, 애인이 먼저 떠나버렸다. 실연의 상처엔 역시 친구들과 술 한잔. 뉴욕에서 마지막을 불태우리라!" 영화 소개글이었다. 너무 가볍지 않을까 싶었는데 먼저 본 사람들의 평이 나쁘지 않았다. 커튼을 닫고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괜찮은 음악들을 배경으로 이십대 친구들의 발랄한 연애사를 지켜보고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터트린 건 제니가 헤어진 남자친구를 공연장에서 만났을 때였다. 남자친구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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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근황모퉁이다방 2020. 6. 23. 22:22
시옷의 독촉이 없었다면 이 글은 아마도 아주 나중에 쓰여지거나 아예 쓰여지지 않았을 거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요즘 흥미롭게 보고 있는 왓챠의 을 보았을 거고 그러다 벌써 11시네, 자야겠다 그러면서 씻고 정리하다 12시가 되었을 거다. 그러다 진짜 잠들었겠지. 요즘은 정말 눕자마자 잔다. 아, 아니다. 지난 주에는 밤산책도 했다. 긴 출퇴근 끝에 군포에 입성하면 외식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집에만 있는데 어느 날 동생이 자고가면서 동네 산책길을 알게 됐다. 밤에 굉장히 많이 먹고 잤는데 동생이 아침에 눈뜨자마자 걸어야겠다고 했다. 좀더 오래 걸어보고자 평소에 가지 않는 길로 갔는데 왠걸 일년 가까이 모르고 있던 멋진 산책코스가 있었다. 그 길에 몇백년 된 은행나무도 있고, 나무의자와 테이블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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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밤모퉁이다방 2020. 4. 18. 14:16
어제는 외식을 하기로 했다.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짧은 나무 길이 있는데, 그 옆으로 약국이 있고 치킨집이 있고 초밥집이 있다. 길과 가게 사이에는 작은 화단이 있는데 초밥집은 간이 테이블을 화단 너머 길가에 놓아놓고 회와 초밥을 포장해서 내놓고 팔고 있었다. 평소 지나가면서 맛집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초밥집 얘길 꺼냈다. 너 걸어오는 길에 초밥집 있지? 거기 회사 사람들이랑 갔는데 꽤 맛있더라고. 언제 한번 가자. 들어가보니 정말 작은 가게였다. 작은 테이블이 세 개 있고 한쪽 벽에 1인석 바가 있었다. 메뉴도 단촐했다. 회와 초밥, 산낙지 같은 국물 없는 메뉴들. 숙성회를 파는 가게였다. 작지만 천장이 높아 그리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방장이자 사장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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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모퉁이다방 2020. 4. 5. 19:05
집에 가려면 지하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한번 타야 한다. 버스정류장까지는 일단 하늘다리식의 긴 통로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요즘 자주 기웃거리는 화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지나고 나무길을 오분여 걸으면 횡단보도가 나온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정류장이 있는데, 정류장 가기 직전에 마트가 있다. 그리 크지 않은데 없는 게 없는 마트다. 마트 밖에는 세일하는 식재료와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다. 나는 매번 그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유심히 들여다본다. 회원으로 전화번호를 등록해 놓은 덕분에 일주일에 두세번 세일 품목을 정리한 문자도 받는다. 한돈암돼지삼겹살 1근 9900원, 노르웨이자반 1팩(1손 2마리) 3980원, 시금치 1단 990원, 백오이(특) 1봉(5개) 2980원. 나는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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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맛의 사과서재를쌓다 2020. 3. 30. 22:05
많이 보는 게 중요하지 않아질 때가 오지. 오래 전, 여행 선배들이 말했다. 그 말은 신묘한 점쟁이의 예언처럼 딱 맞았다. 많이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시간 들여 천천히 보고 싶다. 먹는 것과 머무는 곳에 좀더 돈을 쓰고 무엇을 보기 위해 조바심을 내거나 안달 내지 않고 싶다. 전전긍긍과 근심걱정은 돌아가면 차고 넘치게 할 수 있다. 우선은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 - p. 64-65 아비뇽에서 묵은 곳은 오래된 작은 호텔이었다.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아침마다 주인 할아버지가 내려주는 커피가 정말 맛있어요' 라는 리뷰 때문이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작고 사소한 것일 때가 많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잊힌 채로 선반 위에서 담담히 익어가는 과일이나 빛이 미처 닿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