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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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서재를쌓다 2020. 9. 29. 19:43
나름 번화한 리파리 중심가를 벗어나 조금만 올라가면 깊은 협곡을 피해 발달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과 포도밭, 레몬나무, 드문드문 서 있는 올리브나무 그리고 사이프러스를 만날 수 있다. 화산의 폭발로 만들어진 지형은 마치 판타지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순간의 달콤한 고독을 나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스쿠터를 타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는 안과 밖이 통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풍경은 폐부로 바로 밀고 들어온다. 그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저 아래 까마득한 해안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신중한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절벽을 향해 달려나갈 때, 비로소 나를 이 섬에 데려온 이유, 여기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마저 미처 깨닫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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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서재를쌓다 2020. 9. 27. 16:40
마켓 컬리를 며칠동안 들어갔다 나왔다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하다가 결국 주문했다. 내 생애 이렇게 비싼 치즈들을 그것도 다량으로 구매해 본 것은 처음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억지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은 어느샌가 개인의 역사가 되어 있곤 한다. '시간을 내서' 하지 않아도 그것에 자연스럽게 쌓인 시간은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되고도 넘친다.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도 없이, 이걸 이용해 뭔가를 하겠다는 야망도 없이, 그냥 좋은 것, 그저 끌리는 것. 그것이 내겐 치즈다. 대단하지 않아도, 깊은 의미 같은 건 없어도 그저 좋아하는 세계가 있어서 나는 종종 스스로 부자라고 느낀다.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을 좀 더 단단히 쥐어본다. 그렇게 내 삶을 조금 더 좋아하는 쪽으로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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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모퉁이다방 2020. 9. 24. 07:38
4호선 안이었다. 자유로가 막힌터라 지하철 안에 자리가 드문드문 있었다. 그 날 나는 작은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다리 위에 올려뒀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핸드폰 메세지가 계속 와 책을 봤다 핸드폰을 봤다 했다. 다시 책을 읽는데 아주머니가 왼쪽 팔을 만지며 혼잣말로, 그러나 내게 다 들리게 아씨 뭐라뭐라하면서 짜증을 냈다. 그제야 아차, 내 가방 끈이 팔에 닿았구나 싶었다. 사과를 할까 싶었지만 너무 기분 나쁘게 짜증을 내서 말았다. 마치 내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대신 끈이 안닿게 얼음상태로 있었다. 왠지 끈위치를 바꾸는 것도 싫었다. 아주머니는 씩씩거리며 주위 빈 자리를 둘러보다 (빈 자리는 많았다) 두어 정거장을 더 앉아있다 마땅한 자리가 생겼는지 내 앞을 지나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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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모퉁이다방 2020. 9. 13. 17:14
2주간의 재택근무가 끝났다. 지난 금요일에는 운동 할겸 동네 산책을 했는데 새로 생긴 삼겹살집에 사람들이 그득했다. 2주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외식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사람들은 잘도 돌아다니는 구나. 출퇴근시간이 아예 없어지니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네. 동생이 추천해 줘서 를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귀엽고 두근두근했다. 십대들의 사랑 이야기에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리다니. 김민철 씨의 치즈책을 읽고 거금을 들여 치즈 네 개를 주문했고, 보경이는 이웃의 책이라며 연두색 책을 보내줬다. 상주로 내려간 서울아가씨의 이야기다. 텀블벅에서 한수희 작가님의 새 책도 구매예약했다. 어느 저녁에는 대패 삼겹살을, 어느 저녁에는 LA갈비를 구워먹었다. 동생과 친구와 랜선술자리를 갖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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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요모퉁이다방 2020. 9. 3. 19:35
쏴아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어제는 비가 오고 있었고, 오늘은 숲 속 나무들이 엄청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는 태풍이 올라오는 중이었고, 오늘은 태풍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태풍에 스친 바람은 얼마나 센지 나무들이 쏴아하고 대나무 소리를 냈다. 멀리서도 그게 들렸다. 속이 시원했다. 그 바람을 다 맞고 싶어 방마다 창문을 다 열어두었다가 방문 하나가 쿵하고 큰소리를 내며 닫혀 황급히 모두 닫았다. 책방 문만 남겨두고. 이번주는 재택근무 중이다. 생애 처음이다. 재택근무는. 정말이지 재택근무 체질이라고 느껴지는 일주일인데, 다음주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니 몸이 이 편안함에 익숙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아침에도 원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난다. 그러고 나면 꽤 많은 시간이 남는..